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 제기
사회와 세계 변화를 비추는 거울
변두리에서 조명받지 못한 사회집단의 목소리를
현재로 불러내는 작업

 

박물관은 ‘인류의 기억’이라고 할 만큼 인류가 살아온 오랜 발자취를 추적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그런데 박물관들이 인류의 나머지 절반에 대해 제대로 재현해내지 못한다면? 박물관들이 여성에 대해 여전히 낡은 이야기만 양산하는 공간이라면?

전통적인 박물관의 전시 방식으로는 여성이 드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종되고 만다는 이러한 비판은 1960~70년대에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은 여성 예술가들에 의해 처음으로 개진되기 시작했다. ‘X 12, 12명의 여성 예술가들’ 전시회를 비롯해, 곧 철거될 건물의 17개 방에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퍼포먼스의 장소로 기획한 ‘우먼하우스 프로젝트’를 포함해 다양한 창조적 작업이 봇물을 이루었다. 이 움직임은 남성이 독차지하는 전통적 박물관과 미술관의 구조,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교육의 문제, 여성 예술가들에게 불리한 전시 기회와 구조적 모순 등을 고발하고, 도전하며, 뛰어넘고자 하는 의식의 표현이었다.

‘여성 재현의 정치’를 위한 여성박물관의 국제적 협력

 

출처: 덴마크여성박물관 홈페이지
출처: 덴마크여성박물관 홈페이지
이러한 문제의식은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추진되고 있는 ‘여성박물관 건립운동’의 중요한 배경이 됐다.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여성 관련 사료를 수집하고 유물을 발굴·보존·전시·교육하는 여성박물관들이 전 대륙에서 건립되기 시작했고, 2012년에는 여성박물관의 교류협력 네트워크인 ‘국제여성박물관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Women’s Museum, IAWM)’가 조직됐다.

그 자료에 따르면, 2015년 현재 이곳에 소속된 여성박물관만 포함한다면 전 대륙에 걸쳐 70여 개의 여성박물관이 건립됐거나 추진 중에 있다. 이 기구에 소속되지 않은 다른 크고 작은 여성 관련 박물관들까지 고려한다면, 여성박물관 건립은 가히 세계적인 추세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2002년에 국립여성사전시관이 건립됐으며, 협소한 장소 문제를 타개하고 종합박물관으로 전환하기 위해 2012년부터는 국립여성사박물관 건립을 위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박물관 건립 운동 초기에는 주로 예술가들, 화가들, 큐레이터들이 중심이 되어 작업을 했다고 한다면, 2000년대에 들어서는 역사, 교육, 여성학 이론, 문화이론 연구자들이 참여하면서 여성박물관은 매우 풍성한 내용을 담게 됐다. 특히 역사와 문화, 지역과 종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서로 닮아 있다는 동질감은 여성박물관의 국제적 연대를 고무시키는 중요한 원동력이다.

낡은 포목점 마루가 최초의 여성박물관 

 

젠더적 문제의식 위에 설립됐다는 의미에서 최초의 여성박물관은 1981년 피첸(Marianne Pitzen)이 주창한 독일의 ‘본여성박물관’이다. 그것은 본(Bonn) 시위원회가 여름 한철 한시적으로 빌려준 포목점에서 전시를 시작하고 마룻바닥에서 3년을 버티며 시정부와 줄다리기를 하다가 본격적인 박물관으로 발전했다. 현재 ‘예술, 문화, 연구’를 기치로 내걸고 다양한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박물관은 스튜디오 임대를 통해 수익구조를 창출하고 기금 마련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유럽의 여성박물관들이 주로 개인이 주창해 설립된 것과 달리, 오르후스의 돔키르크플래스(Domkirkeplads) 5번지에 있는 덴마크여성박물관은 매우 독특하다. 이곳은 1857년 원래 시청이 있던 자리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랫동안 경찰서 건물로 쓰였다가 1984년 가을부터 여성박물관으로 사용됐다. 1990년대 초에 1000만 크로네를 들여 대대적인 수리를 한 이후 오늘에 이르게 된 박물관은 풀뿌리 여성운동으로 시작했다가 1991년부터 국립박물관으로 바뀐 경우다. 남성적 권력의 상징인 경찰서가 여성박물관이 됨으로써, 도시공간에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더욱 새롭게 더욱 가까이

현재 여성박물관은 새롭게 변모하고 있다. 낡은 공장 시설을 개조한 독일의 비스바덴여성박물관, 장신구박물관으로 시작해 해당 지역의 문화센터로 변모한 이탈리아 메라노박물관, 여성이론 연구를 강조하는 아르헨티나 여성박물관, 젠더 평등권을 주장하는 우크라이나 젠더박물관, 주정부에서 건립한 미국 여성명예의전당들, 박물관 건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인터넷상에서 여성사료 아카이브를 조직하고 다양한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미국의 여성사박물관, 국가가 건립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중국과 베트남의 여성박물관, 경제적 어려움으로 여자대학에 부속돼 있으나 박물관 건립을 위해 노력하는 아프리카의 수단 여성박물관 등에 이르기까지 여성박물관의 변모는 현재진행형이다.

 

아울러 세계의 여성박물관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19~20세기 여성의 급격한 변화를 함축하는 물건, 사진, 기록물의 수집과 동시에 여성들의 전통, 지혜, 구전 등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탐색이 수반된다는 사실이다. 둘째 여성의 역사 및 사회 현안과 현대예술을 적극적으로 결합하려는 시도다.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과 그림, 설치물, 혹은 비디오 등을 결합하는 총체적 작업,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통섭적 작업이 그것이다. 셋째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세계의 여성박물관들을 잇는 초국적이고 문화 교차적인 협력이 이뤄지고 있다.

여성박물관은 ‘사회와 세계 변화를 비추는 거울’이다. 동시에 여성박물관은 그동안 역사의 변두리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여러 사회집단의 목소리를 현재로 불러내어 함께 가자고 제안하는 ‘배려의 공간’이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국에서도 국립여성사박물관 건립에 박차를 가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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