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운동하는 사람들70] 이이 효재 '여성한국사회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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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여성계를 이끄는 여성운동가들이 존경하는 인물로 가장 많이

꼽는 이가 있다면, 바로 이이효재 선생(76)이다. 그는 가족학 연구의

권위자로 많은 연구업적을 남긴 사회학자이자 여성학을 국내에 소개

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한‘여성학계의 대모’로 불린다. 뿐만 아니

라 7,80년대 진보적 여성운동의 지표를 제시하며 후배들과 함께 몸

소 실천해 보였다.

그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은 지은희(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이미경(국회의원), 신혜수(한국여성의전화연합 공동대표), 장하진(한

국여성연구소 소장), 최영희(내일신문사 사장), 고은광순(호주제 폐지

운동가), 오한숙희(여성학자) 씨 등 그의 제자들이 현재 여성계의 대

표주자로 활약하는 것을 볼 때 그가 한국의 여성운동에 미친 영향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여성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남성 지

식인들 사이에도 ‘진보적 지성’으로 일컬어지며 존경받는 여성이

다.

그는 3년 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가족들이 있는 진해로 내려가

남은 연구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벚꽃이 만개해 군항제가 한창인 지

난 7일 그를 만나러 경남 진해를 찾았다.

청각이 약해져 보청기에 의존해야 하는 불편함을 빼면 76세 고령의

나이에도 그는 건강했다. “진해에 처음이야? 그럼 진해구경도 하고

가야지”하며 따뜻이 맞아주시는 선생님은 겉으로 비춰지는 강한 이

미지와는 달리 따뜻하고 자상한 웃어른의 모습이었다.

진해에서 한국가족사 전념

서울과 마찬가지로 진해시도 선거가 한창일 때여서 그는 정치에 대

한 걱정이 많았다.

“정치구조가 아직도 남성 중심이다 보니 할당제라고 하는 게 여성

에게 주는 특혜 정도로 이해되고 있어요. 여성들은 한마디로 ‘들러

리’지. 앞으로 남녀가 평등해지는 데 있어서 관건은 풀뿌리민주주

의에서 여성들이 성장할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여성운동이 바로

풀뿌리민주주의로서 지역사회 생활에 혜택을 주고, 개혁을 이루는

데 앞장서야 해요. 지방의회에서부터 여성의 힘이 자라야지 정당이

나 남성 권력자들이 무시할 수 없는 거지.”

여러 단체에 걸쳐 있던 활동을 스스로 정리하고 조용히 진해에 내려

와 있지만, 여전히 운동의 현장감과 날카로운 비판력을 잃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가 현재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단체는 두 곳이다. 주로 가족

연구를 하고 있는 ‘여성한국사회연구소’ 이사장직과 경신재단

‘경신사회복지연구소’소장직을 맡고 있다.

그의 진해행의 직접적인 계기는, 해방직후 부모님이 시작한 고아복

지사업에 이어 현재 이종조카가 운영중인 종합복지재단 사업을 돕기

위한 것이다. 마산에서 목회 활동을 했던 아버지는 해방 직후엔 주

위 고아들을 집에서 돌보는 일로 시작해 본격적인 복지사업에 힘을

쏟았다. 5녀 1남 중 둘째딸인 그는 언니와 함께 부모님의 복지사업

을 잇고 있다. 13만 남짓한 진해시 주민들을 위한 장단기적 복지계

획을 위해 그는 ‘경신사회복지연구소’에서 노인복지와 청소년을

위한 정책 제안 등의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진해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필생의 과제였던 한국가족사 연구

로 보내고 있다. 조선조 후기사회의 변화 과정에서 가부장제라는 지

배층 문화가 어떻게 민중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쳤는지 늘 궁금했다며

상민과 노비층의 가족생활사 연구에 몰두 중이다.

가족연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50여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해방

과 더불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사회학을 전공한 그는 거기서 6.25

전쟁과 분단이 고착되는 상황들을 지켜봐야 했다. “통일을 이루기

위해선 우리 사회가 민주화해야 하는데, 무엇보다 가부장적인 가족

부터 민주화하고 평등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성문제와 가족문제

에 관심을 갖게 됐단다. 지금도 그는 “가족이 변하지 않으면 사회

변혁이 가능하지 않다”고 확신한다. 한때 그는 가족문제를 연구하

면서 “가족이 평등사회 실현에 걸림돌이 된다면 해체될 수밖에 없

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그는 가족개혁이 반드시 가족

해체를 통해서만 가능한 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오히려 가족을

다양한 형태의 열린 가족, 평등하고 민주화된 가족으로 바꾸는 일이

핵심이라고.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적인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고, 사회적 민주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게 그가 도출한 결론이다. 그

는 결혼을 하지 않은 채 현재 수양딸과 살면서 혈연가족이 아닌

‘열린 가족’을 실천하고 있다.

그는 58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치며 가

족문제와 여성문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60년대 대

부분 졸업 후 결혼을 해서 안주해 버리는 제자들을 보며 안타까웠

고, 여성의 대학교육에 회의가 들기도 했다. 이에 70년 이화여대 내

‘한국여성자원개발연구소’를 개소하고 ‘여성은 지역사회 주인’

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여성들의 지역사회 조직화에 눈을

돌렸다. 이때 이미 그는 지역운동과 생활정치를 시도한 것. 지역사회

주부들 문제를 조사해 소비자협동조합의 전단계인 공동구매, 협동보

육원, 놀이터 공동관리 등을 실험했다.

국내 여성학 도입한 선구자

그는 국내에선 처음으로 이화여대에 여성학을 소개함으로써 여성학

한국 상륙의 산파역을 했다. 75년 멕시코 세계여성대회에 참가해 활

발한 여성운동의 조류를 접한 그는 그 이듬해 여성학 교육의 필요성

을 제시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후 ‘여성학 설치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78년 드디어 여성학을 교양과목으로 개설하게 됐다. 그때

당시 조교로 그를 도왔던 이들이 이미경, 신혜수, 장하진, 최영희 씨

등이라고. 이들과는 이대 최초 학생운동서클인‘새얼’의 멤버와 지

도교수로 만났고, 지금도 그가 아끼는 제자들이다.

70년대 들어서 반공 안보논리를 내세워 저임금 노동자들을 착취하

는 군사정권과 이에 저항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지켜

보면서, 그는 가족민주화와 더불어 여성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자마자 또다시 등장한 군사정권과 함께

80년대가 시작됐고, 그의 인생에도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양심 있

는 지식인으로서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과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교수

들의 서명운동에 참여함으로써 해직교수가 된 것. 그때 당시를 회상

하면서 그는 해직 직후엔 생활이 막막했지만,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그 덕을 봤다”고 웃는다.

“‘해직교수협의회’활동을 하면서 복직운동도 하고 재미있었어.

또 월급쟁이 생활을 하다 쉬면서 책도 쓸 여유도 있었고 나중에 복

직하면서 책을 여기저기 출간하면서 집도 사서 오히려 재테크도 했

어.”

해직기간 동안 제자들이 아현동 굴레방다리에 마련해 준 연구실에

‘여성한국사회연구회’라는 현판을 걸고 여성들만의 연구활동을 시

작했다. 84년 복직이 된 후에도 그의 적극적인 실천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87년 출범한 ‘한국여성민우회’ 초대 대표를 맡으며 본격

적인 여성운동에 뛰어들었고, 90년엔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91

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정대협’ 활동은 대학 동창이자 대학 동료교수로 평소 가까웠던

윤정옥 공동대표와 함께 파트너를 이뤄 가장 최근까지 그가 애정을

쏟았던 활동이다. 10여년 간의 꾸준한 노력으로 역사에 묻혀 있던

일제시대 정신대의 문제를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 알리고 쟁점

화시키는 등의 성과를 낳았다. 이런 공로로 그는 프랑스의 권위있는

여성잡지 '마리클레르'가 뽑은 세계를 발전시킨 1백명의 여성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서 벗어나는 일에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97년 정부에서 수여하는 훈장을 5공 인사와 함께 받

을 수 없다며 거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그때 언론들이 근본

취지를 보도하지 않고 마치 제일 처음으로 훈장을 거부한 ‘사건’

으로만 취급한 게 아쉬웠단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타협하지

않아서 손해본 건 없다고 말한다.

“난‘내 멋대로’살아. 결코 누구에게 나처럼 살아라고도 하지 않

아. 그저 생긴대로 사는 거지.”

21세기 화두는 ‘남녀공존’

여성운동의 최전방을 후배들에게 맡긴 지금도 후배들이 도움을 요

청해 올 때면 그는 결코 거절하지 못한다. 그간의 활동을 정리하고

서울을 떠나기 바로 전인 97년 초에도 부모성함께쓰기 운동과 호주

제폐지운동을 사회 이슈화하는 데 그는 힘을 실어주었다. 몸은 같이

있지 않지만 마음으로는 든든한 ‘백’이라는 게 후배들 얘기다.

20세기 한국여성운동사에 족적을 남긴 노학자는 21세기를 어떻게 전

망할까?

“21세기에 사회가 달라질 수 있느냐 없느냐는 우리 하기에 달렸

다”는 게 그의 답이다. 그는 후배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이전 세

대와는 달리 요즘 젊은 세대들 사이엔 공론화시키는 문화가 지배적

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희망’이 보인다고 낙관한다. 하지만 그

는 좀더 욕심을 내서 후배들에게 주문한다.

“이제까지 남성 질서에 대한 저항과 반대는 많이 있어 왔지만 앞

으로는 남녀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에 대한 연구가 필요해요.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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