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소리’ 7월 3일 서울시청서 공연 “소리로 희생자 넋 달랜다”
“소녀시대와 국악 컬래버레이션 괜찮을 듯… 홍대나 대학로에 국악 공연장 내고 싶다”

 

안숙선 명창은 “무거운 등짐 짊어지고 걷는 게 소리길”이라고 했다. 그 길을 스승을 거울 삼아 60년을 걸었다. 그런데 소리가 보물이기 때문일까. 그의 얼굴은 고생한 듯 보이지 않았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안숙선 명창은 “무거운 등짐 짊어지고 걷는 게 소리길”이라고 했다. 그 길을 스승을 거울 삼아 60년을 걸었다. 그런데 소리가 보물이기 때문일까. 그의 얼굴은 고생한 듯 보이지 않았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메르스라는 재난 탓에 공연이 연달아 연기돼 안타까워요. 어제(6월 18일) 대학로에서 열린 ‘인문학과 판소리의 만남’은 많은 분들이 마스크를 쓰고라도 온다고 해서 강행했지요. 관객들의 성화가 없었으면 못 했을 거예요. 우리야 무대에 서야 활기가 나는데….”

6월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에서 만난 안숙선(66‧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명창은 메르스 여파로 위축된 공연계 걱정부터 했다. 서울문화재단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20주기를 맞아 마련한 창작 판소리 ‘유월소리’도 지난 24일 열 예정이었다가 7월 3일로 늦춰지고 장소도 서울시청 시민청 활짝라운지로 옮겨졌다. 안 명창은 이 무대의 소리와 작창을 맡았다. 남한산성아트홀 모노드라마 페스티벌도 9월로 연기됐다. 안 명창은 9월 4일 ‘심청전’을 모노드라마로 재해석한 무대로 관객들과 만난다.

“의롭고 정의로운 이들이 나라 구해”

-‘유월소리’는 민간구조대원의 증언을 토대로 작창을 하셨던데요.

“작은 일을 소홀히 하다가 큰일이 생겼어요. 집안에서 살림 사는 것도 똑같잖아요.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게 된 것이죠. 민간구조대는 의롭고 정의로운 분들입니다. 그들이 나라를 도운 거죠.”

-지난해 7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해금 연주자 강은일 등과 함께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공연도 열었는데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도, 세월호 사건도 국가적 재앙이라는 공통점이 있지요. 판소리를 듣고 아픔이 치유가 됐으면 좋겠어요.”

안 명창의 무대를 본 사람들은 작고 여리여리한 체구에서 뿜어 나오는 소리의 힘에 놀란다. 어릴 때 판소리 동편제 거목인 외당숙 강도근 명창에게 배운 덕일까. 동편제는 남성적이고 꿋꿋하고 호쾌하다. “소리는 온갖 우주를 품어야 한다. 엄청난 에너지로 휘어감아 폭포를 떨어뜨리고 번개 치는 소리, 우박 우당탕하는 소리, 화산 터지는 소리…. 소리를 몰아가서 확 터뜨리고 또 시작하고 또 시작하고…. 힘만 있다고 표현되는 게 아니라 앞과 뒤, 속과 겉을 얼마나 잘 조화를 이루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득음은 타고나야 하지만 노력 없이는 안 된다.”

그의 목 음색이 가진 특장점은 호소력이다. 판소리 용어로 애원성이 있다고 한다. 관객에게 애원하듯 달라붙는 소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애원성만 갖고 노래하는 건 아니다. 소리를 표현하려면 많은 공력이 뒤따라야 한다. “하루 이틀만 쉬었다 해도 필름이 끊기는 것 같아요.” 그의 소리 연습이 질기고 독한 것은 국악계에서 소문난 일이다.

그는 “소리길은 험한 길이다. 나와의 싸움이 가장 중요하다”며 “무거운 등짐 짊어지고 가는 길이 소리의 길”이라고 했다. 외길 인생을 걷겠다는 집요한 자존심이나 오기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선생님들 말씀이 소리하는 사람이 약아빠지면 못쓴다고 했어요. 멍청할 정도로 ‘내 길은 이 길이다’ 하고 꾸역꾸역 가야지, 꾀부리면 안 된다는 거죠.” 소리 공부가 아니라 ‘학습’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쟤는 학습이 못 쓰겠네” “학습이 괜찮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소리가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제자들 사이에서 ‘안내비’(내비게이션)로 통하는 이유를 듣고 기자는 웃었다. “젊어서부터 늘 학습하느라 시간에 쫓기니까 차량이 잘 밀리지 않는 도로나 골목은 꿰뚫고 있거든요.”

 

안숙선 명창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20주기를 맞아 7월 3일 서울시청 시민청 활짝라운지에서 여는 창작판소리 ‘유월소리’의 한 대목을 선보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안숙선 명창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20주기를 맞아 7월 3일 서울시청 시민청 활짝라운지에서 여는 창작판소리 ‘유월소리’의 한 대목을 선보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아기 명창, 60년 국악 외길 걷다

그의 DNA에는 소리의 피가 흐르고 있다. 외당숙뿐 아니라 이모가 가야금 명인인 강순영이고 대금산조 인간문화재 강백천은 친정어머니의 사촌이다. 어려서부터 소리를 잘해 ‘아기 명창’으로 불렸던 그는 아홉 살 때 주광덕 명창의 문하로 들어가 소리의 기초를 배우고 가야금을 배웠다. 열아홉 살 때 상경해 김소희, 박봉술, 정광수 등 여러 명창에게 판소리 다섯 바탕을 익혔다.

물론 한창 때 외도를 안 한 것은 아니다. 결혼 후 남편과 순댓국 밥집을 차렸다고 한다. 당시 국제관광공사 단원으로 워커힐 호텔에도 공연을 다녔다. 워커힐 호텔에선 하루 두 번 공연을 올리는데 1부가 민속, 2부가 캉캉춤 무대였다. 국악인이란 자긍심을 갖기란 어려운 시절이었다.

순댓국 밥집 문을 닫은 후 남편과 인천시 소래면에서 젖소 다섯 마리를 키웠다. 서울 연남동 집에서 안양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소여물을 산 후 다시 우사로 갔으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뒤에야 예술가라는 자부심이 생겼다. 그는 당시 “국악인으로 뼈를 묻겠다”는 마음을 다잡았다. 국립창극단 신입 단원으로 출발해 원로 단원을 지내기까지 40년 가까이 창극단에 있으면서 두 차례 예술감독을 지낸 터라 창극에 대한 열정은 지금도 뜨겁다.

그는 정광수에게 수궁가를 배웠고 박봉술에겐 적벽가, 정권진에겐 심청가를 배웠다. 판소리 오바탕을 떼고 나니 소리꾼 교과서를 다 뗀 것 같아 뿌듯했다. 1986년 남원 춘향제의 전국명창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뒤 ‘명창’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스승들은 늘 “남 앞에 서려면 소리만 잘해선 안 된다. 인격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약속 하나 허투루 생각하는 걸 싫어해서 시간도 칼같이 지켰다고 한다.

스승들은 그의 든든한 울타리였다. 생존해 계실 때는 미처 몰랐다, 돌아가신 지 20년이 지나 그 나이만큼 된 지금은 “평생 노심초사해온 선생님들만큼 국악 발전을 위해 일하지 못한 것 같다”는 후회로 밤잠을 설친다.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인 박귀희 선생은 사재를 들여 국악예고를 세운 후 재산을 쾌척했다. 새 옷을 입고 오셔서 어디서 샀느냐고 물으면 스승은 “남시싸롱에서 샀다”고 농담을 했다. 남대문시장에서 사 입었다는 말이다. “박귀희 선생님은 ‘무대에 설 땐 너는 공인’이라고 하셨어요.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거죠. 회의할 때 급하게 집에서 입던 옷 입고 달려오면 ‘공인의 의복을 갖춰서 입고 다녀라’고 말씀하셨지요.”

 

20대 시절 남편과 함께 순댓국 밥집을 차리고, 젖소 다섯 마리도 키웠다. 소리길 60년이 평탄한 대로만은 아니었다. 구불구불 이어진 그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안숙선 명창의 소리가 호소력 있는 것은 삶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0대 시절 남편과 함께 순댓국 밥집을 차리고, 젖소 다섯 마리도 키웠다. 소리길 60년이 평탄한 대로만은 아니었다. 구불구불 이어진 그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안숙선 명창의 소리가 호소력 있는 것은 삶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유치원부터 우리 가락 가르쳐야”

그는 소리를 알아듣는 ‘귀 명창’들이 늘 고맙다. 관객들은 그를 보물처럼 여기고 귀한 사랑을 줬다. 소리가 끝날 때마다 “이 대목은 어떻다, 저 대목은 어떻다.” “비녀를 꽂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해서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정말 좋은 소리를 다음번엔 들려주리라 다짐했다. “똑같은 소리 같지만 그때그때 느낌이 달라요. 야구에서 홈런 치듯 소리판에서 홈런을 칠 때가 있어요. 귀신 붙는 소리를 냈을 때 소리판에 선 것에 만족감이 들지요. 우리는 ‘머리에 신접을 했다’고 하지요.(웃음)”

여유 없이 앞만 보고 쭉 달려온 데 대한 아쉬움이 크다. 아이들 생일도 제대로 못 챙기고 살았다. “올해 아흔하나 되신 시어머니가 살림도, 아이도 다 거둬주셨다”며 그는 미안해했다. 주변에 자신을 돕는 이들이 없었다면 춘향이로, 심청이로 커튼콜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는 “주변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소리만 빼면 허당’이라고 한다”며 웃었다. ‘글 읽는 선비’ 같은 남편은 쓴소리를 자주 했다. ‘국악계의 프리마돈나’로 많은 사랑을 받은 아내에게 “잘한다” “잘한다” 칭찬하면 자만할까봐 걱정해서다. “남들의 시기나 질투를 받지 않으려면 아예 실력이 도드라져야 한다. 열심히 공부하는 길밖에 없다”고 늘 다그쳤단다.

그는 자기관리를 참 열심히 했다. 점심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옮겼을 때 가방에서 스카프를 꺼내 목에 둘렀다. 에어컨 바람 때문이란다.

-우리 가락이 어렵다는 이들이 있는데요.

“생활 속에서 많이 들어보지 않아서 그래요. 우리 소리를 유치원생 때부터 가르쳤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민요도 들려주고, 소고나 장구 같은 국악기도 가르치고요. 서태지의 노래를 듣다보면 판소리 가락과 일부 비슷해요. 어려서부터 자주 들려주면 국악이 어렵지 않아요. 소녀시대와 국악 콜라보레이션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웃음)”

-국악의 대중화가 오랜 숙제인데요.

“쑥대머리는 패러디해서 코미디 공연도 하고 있어요. 판소리의 가장 감동적인 대목을 ‘눈대목’이라고 불러요. 눈대목을 중심으로 하는 공연도 활성화하고 싶어요. ‘사랑가’로 학생들에게 가락을 만들어 오라 해서 대회를 여는 것도 좋겠네요. 음악 없는 나라가 어디 있어요? 우리말을 가르치듯 소리도 가르쳐야 합니다.”

그는 오는 7월부터 현대자동차 정몽구 재단의 ‘예술세상 마을 프로젝트’에 참가해 전북 남원시 비전마을 아이들을 대상으로 마스터 클래스를 연다. 동편제 창시자 송홍록 선생 생가가 있는 이곳에서 소리를 가르칠 생각을 하니 뿌듯하단다. 그는 “홍대나 대학로에 국악 공연장을 내는 것이 오랜 꿈”이라고 했다.

-2남1녀 중 국악인이 된 자녀가 있어 뿌듯하시지요.

“외동딸(최영훈)이 국립창극단 거문고 연주자로 있어요. 큰아들은 대학 국악과를 다녀 내심 소리꾼이 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엄마만큼은 못 하겠다’며 작파했어요. 막내아들도 해금을 하다 접는 바람에 아쉬움이 남아요. 손녀 6명, 손주 1명을 뒀는데 맨윗손녀가 국악고 3학년생이에요. 어릴 때는 별로라 하더니 갑자기 하고 싶다면서 해금을 시작하더라고요. 얼마전 콩쿠르에서 은상을 탔다기에 금일봉을 주면서 격려해줬죠.(웃음)”

‘국악계 얼굴’ 안숙선은

우리나라 첫 여류 명창은 진채선. 안숙선은 진채선, 이화중선, 김소희 등 여류 명창의 계보를 잇는 대표적인 국악인이다.

1949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전국의 학생명창대회를 휩쓴 재주 많은 소녀 명창이었다. 19세에 상경해 김소희에게 판소리 ‘흥보가’와 ‘춘향가’를 배우면서 본격적인 판소리 수업을 받았다. 86년 판소리 완창발표회를 시작하면서부터 주목 받기 시작했고, 박귀희로부터 가야금 병창을 익혀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 보유자’로 지정됐다. 고 김소희 명창과 고 박귀희 명인이 가장 아끼는 제자로 두 분이 안 명창을 자신의 큰 제자로 앉히려고 은근히 경쟁(?)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국립창극단에 입단하면서 타고난 좋은 성음과 뛰어난 연기력으로 창극 명인으로 자리잡았다. 국립창극단 단장을 지냈으며 예술감독도 두 차례 역임했다. 창극이 해방 전후의 시기를 이어 제2의 전성기를 맞는데 크게 기여했다. 윤중강 연출가는 “안숙선 명창은 진정 국악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며 “현존하는 판소리명창 중에서 다양한 명창들의 다채로운 소리를 보유하고 있는 명창은 드물다”고 상찬했다.

윤 연출가는 또 “안숙선을 얘기할 때 꼭 얘기하는 곡조가 있다. 바로 ‘토끼이야기(the rabbit story)’”라며 “김덕수 명인과 한울림예술단, 다국적 재즈그룹 ‘레드선’과 함께 만든 이 노래는 안 명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25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93), 예술문화훈장(프랑스문화부 1998), 제48회 서울시문화상(1999), 옥관문화훈장(1999) 등을 받았다. 주요 공연으로 판소리 다섯마당, 유럽8개국 순회공연, 춘향가 완창, 수궁가 완창, 적벽가 완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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