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 참으로 오랜만에 그 이름을 듣는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소설이나 시집을 산 기억이 없다. 왜 그랬을까. 한때는 우리 모두 문학 소녀였고 소설이나 시를 통해 세상을 읽곤 했는데 지금은 하루 종일 모바일 폰으로 세상과 접속한다. 그게 모두 신경숙과 창비의 잘못은 아니겠지. 신경숙은 ‘주례사비평’의 최대 수혜자였고 나로서는 아무도 관심두지 않는 문학의 죽음보다 표절 사건이 백 번 낫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읽지 않는 문학과 더불어 나는 운동의 위기도 함께 왔다는 생각이 든다. 출판도 안된 책을 가제본해 돌려보고 여성주의 커리큘럼을 짜고 읽어야 할 책을 무슨 보물처럼 공유하던 시대, 좋은 글귀를 노트에 메모하고 책을 통째로 필사하던 시대의 문학은 여성운동과 긴밀히 접속되곤 했다. 그러나 지금 책은 낡은 몸이 되고 책을 읽거나 쓰거나 생각하는 행위들이 점점 여성운동에서 밀려나고 있다.

우리가 매일 접속하는 미디어 속의 여성은 생각하지 않는, 생각해선 안 되는 ‘몸’이다. 여성이 정치나 사회를 비판하고 글을 쓰는 행위는 착한 몸매들에게만 허락된다. 한국여성민우회가 폐지운동을 하는 ‘렛미인’은 2개월 만에 30킬로그램을 빼는 극적 효과를 통해 우리 모두를 성형산업과 다이어트 산업의 잠재적 고객으로 만들 뿐 아니라 수년간 노력해야 이룰 수 있는 내면의 힘과 자신감, 당당함이 무슨 의미냐고 비웃곤 한다.

글쓰기는 존재와 성장의 증표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여성의 사적 경험을 말하고 쓰는 행위를 통해 성장해왔고 글을 쓸 수 있는 여성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삶이나 운동의 의미를 정리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지난해 전국여성대회에서 어느 젊은 여성활동가의 “목에 빨대를 꽂고 빨리는 느낌이 든다”는 고백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여성운동을 보는 듯해서 가슴이 아팠다.

남성 필자들은 종종 서문에 이 책을 쓰기까지 기꺼이 불편을 감수해준 아내와 가족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여성들도 누군가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싶다. 읽고 쓰는 그 시간을 자신을 포함해 누군가는 감내해주어야 한다. 여성모임과 여성단체들도 그런 시간과 관계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많은 여성들이 가사와 일을 다 한 뒤에 한밤중에 조각보를 기우듯 시간을 주워 모아 글을 쓴다. 점차 전업작가나 교수들만의 아주 특별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여성은 왜 이렇게 시간이 없는 것일까. 성과 중심의 조직 문화, 불안한 노동 환경, 가사 분담을 하지 않는 가족 문화, 육아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부과되는 노인 돌봄 등 여성의 일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결합이자 24시간 대기노동이다. 시민운동 내에서도 여성은 전체운동을 조망하기 어려운 온갖 집안일 같은 소모적인 일을 도맡고 있지는 않는가.

여성들은 글을 쓸 수 있을까. 글을 쓰면서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성찰할 수 있을까. 상품화된 몸 이외의 여성의 정신과 내면은 없다고 간주하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의 글쓰기는 저항이자 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여성운동가들이, 지역에서 모든 여성들이 성찰과 성장의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을까. 여성운동이 여성문학과 다시 사랑에 빠지길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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