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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싶은 그 세상은...

어쩌다 흔치 않은 결혼식이 열리면

“당신은 당신 인생의 주인입니까?”

라고 결혼식 주례가 신랑, 신부에게 묻는 세상.

신랑이 남자고 신부가 남자여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

검은 머리 파뿌리 되기 전이라도 서로 원하지 않으면 헤어질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나와 다른 한 사람의 삶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느냐

고 주례가 비장하게 물어주는 결혼식이 있는 세상. 때론 아무런 다

짐도 없이 그저 ‘행복하세요’ 한 마디로 주례사가 끝나버리는 결

혼식도 열리는 세상.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은 ‘구인’란에 ‘연령, 학력, 성별을 막론하

고 해당 분야에 전문지식이 있거나 매우 강한 흥미를 갖고 있는 사

람’이라고 명시하는 그런 곳. 내가 원하는 세상은 나이 육십에도

유학을 떠나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 내가 살고 싶은 세상

은 결혼하지 않았어도 부모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아이를 낳거나 아이와 함께 살 수 있는 그런 세상.

내가 원하는 세상은 한 달에 서른 시간만 일해도 먹고 살 수 있

는 세상. 누구나 평생 머물 집과 입을 옷과 먹을 것을 구할 수 있

는 그런 곳.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르게, 개성 있게 사는 게 더 중요한

세상. 그래서 남들보다 값비싼 것을 갖고 있다는 게 하나 자랑거리

가 될 이유가 없는 세상. 대신 너무 너무 다양한, 알록달록한 모양

으로 자신을 치장할 수 있는 재밌는 세상.

평생 홀로 살다가 칠순에 이십대 남자와 결혼한 새댁과 열여덟에

결혼했다가 스물에 헤어져 서른에 독신으로 아이를 입양한 애엄마,

그리고 육십이 넘게 서로 사랑하며 사는 부부가 서로 이웃해 살면서

가끔 즐거운 저녁 식사를 함께 나누는 그런 세상.

나와 조금 다르게 산다고 남을 미워하지 않는 세상. 나와 다른 삶

의 색깔이 예쁘다고 느낄 수 있는 세상.

집안일과 바깥일이 따로 있지 않은 세상. 한 공기의 밥을 만들어

도 그 노동의 대가를 얻을 수 있는 세상. 우울한 표정의 넥타이를

맨 남자들이 소공동의 점심시간에 쏟아져 나오지 않는 세상. 노란

티셔츠에 머리를 빨갛게 염색한 오십대 남자가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지나가는 세상. 히피스타일의 셔츠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교장선

생님이 교실을 돌며 학생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세상. 학생들이 던

진 질문에 “어! 그거 나도 아직 잘 모르는데. 다음 시간에 알아보

고 이야기해 줄게. 너희들도 같이 조사해서 우리 함께 토론해 볼

까?”하고 씩 웃으며 제안하는 선생님이 많은 세상.

24-32-24의 몸매에 정장을 하고, 머리에 컬을 넣고, 온갖 장신구

를 하고, 두꺼운 화운데이션으로 얼굴을 덮은 여자가 지나가면

“어! 멋진 가장무도회에 가나보다” 싶어 재밌게 구경하는 세상.

자기 몸매에 맞게, 자유롭게, 가뿐한 옷차림으로 어디에든 갈 수 있

는 세상.

전국민이 돌아가면서 인생의 어느 하루는 대통령으로 살아야 하는

세상. 권력이 어디에나, 모두에게 공유되는 세상. 그래서 실은 권력

이 없는 세상.

동네 입구에 마을 회관에 ‘공동식당, 공동육아실, 공동도서실, 공

동휴게실, 세탁실, 병원, 서점....’이 있는 세상. 그래서 집집마다 부

엌이 없어도 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싶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

이 있고, 돌아가면서 공동식당에서 한 달에 하루만 모두를 위한 밥

을 지으면 끼니를 너끈히 해결할 수 있는 세상. 동네의 모든 아이

들의 이름을 누구나 기억하는 세상. 엄마가 없어도 아이의 생존이

위협받지 않는 세상.

모여 앉아 사과를 깎아 먹으면서 뜨개질도 하고 부침개도 부쳐 먹

으면서 열시간 이상 수다를 즐겁게 떨 수 있는 남자들로 가득한 세

상. 씩씩한 여자아이가 얌전한 남자아이에게 공차는 법을 열심히 가

르쳐 주는 게 이상하지 않은 세상. 찌든 얼굴로 동네 까페에서 종일

줄담배를 피우는 십대들이 없는 세상.

동사무소가 동네 사랑방인 세상. 아주 먼 여행이 아니면 자동차를

타지 않아도 되는 세상. 자전거로 어디든 다닐 수 있는 세상. 누구든

지 찌푸린 표정으로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모르는 사람끼리도 서로

다가가 손을 잡아주는 세상. 사람이 무섭지 않은 세상.

이숙경/chuuuk@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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