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성 화가 그림 곁들인 시화집
“내 속에 깃들어 살아온 여자들에게
밥 한 끼 대접하고픈 마음으로 쓴 시들”

 

미국 화가 지지 밀스의 ‘그녀는 오래된 검정 폰을 가지고 있었다’. ⓒ지지 밀스
미국 화가 지지 밀스의 ‘그녀는 오래된 검정 폰을 가지고 있었다’. ⓒ지지 밀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여성들에게 따뜻한 선물을 건네고 싶었어요.”

중견 시인인 나희덕(49) 조선대 교수가 해외 여성 화가들의 그림을 곁들인 시선집 『그녀에게』(예경)를 냈다. 등단 26주년을 맞은 그의 첫 시선집이다. 그동안 발표해온 시집들과 지난해 미당문학상 수상작 ‘심장을 켜는 사람’을 비롯한 신작 시 중 여성성을 주제로 엄선된 작품을 실었다.

여성성을 테마로 다룬 시를 한 편씩 읽다보면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느낀 상처와 좌절이 생생하게 전해져온다. 그는 “여성들은 나이가 들면서 훨씬 더 풍부해지고 강해진다. 하지만 여성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신화 속 요정인 사이렌에 가까워져가는 일”이라고 말했다.

“사이렌의 노래는 사람들을 유혹해 치명적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알려져 있어요. 하지만 이는 지레 사슬로 자신의 몸을 묶고 한 줌의 밀랍으로 귀를 막은 오디세우스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요. 사이렌은 사랑을 잃고 목소리마저 잃었어요. 카프카가 ‘사이렌의 침묵’이라는 짧은 글에서 묘사한 것처럼 ‘그녀들의 고개 돌림, 깊은 호흡, 눈물이 가득 찬 눈, 반쯤 열린 입’을 제대로 보았다면, 그녀들의 침묵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면, 그는 사이렌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여성들의 내밀한 고민, 사랑의 열망과 통증, 모성, 자기만의 공간에 대한 갈망, 불확실한 미래와 나이듦에 대한 불안 등 같은 시대를 함께 통과하고 있는 여성 독자들에겐 그의 시가 잔잔한 위로가 된다. “내 속에 깃들어 살아온 수많은 여자들에게 밥 한 끼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같은 시대를 함께 통과하고 있는 여자들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는 마음으로 시를 썼어요.”

 

나희덕 시인
나희덕 시인

책 제목의 ‘그녀’는 생물학적 여성만이 아니다. 여성성의 가치를 추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남녀를 불문하고 타자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세계의 본질을 용기 있게 대면하고 사랑의 윤리를 체득하고 실천해가는 모든 사람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제가 발표한 초기 시에 대해 ‘모성적’ ‘희생적’이라는 평을 들었어요. 가부장적 언어를 답습해온 건 아닌지 자성했고 그걸 깨뜨려가면서 여성 시인임을 자각하게 됐지요. 이번 시선집에선 가부장 체제가 미화하면서 희생을 강요하는 수동적 어머니상이 아니라 가부장 체제를 분명히 인식하고, 대립이 아니라 이를 끌어안는 능동적 여성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어요.”

책에는 세계 각국에서 활동 중인 여성 화가인 지지 밀스, 카렌 달링, 엘리너 레이, 니콜 플레츠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들이 영어로 번역된 시인의 시를 읽고 깊은 공감을 보여준 덕에 시화집을 낼 수 있었다. 독일의 초기 표현주의 화가인 파울라 모데르존 베커, 핀란드의 헬레네 슈에르프벡, 덴마크의 안나 앙케 등의 작품도 실어 시대와 공간을 넘어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냈다.

시선집에 실린 그림은 모두 64점. 오래전에 작고해 저작권료를 낼 필요가 없는 작가들의 그림이 15점이다. 장당 저작권료가 보통 50만∼70만원 선. 화가들은 시인의 작품에 공감해 저작권료를 받지 않거나 싼 값에 그림을 제공했다. 그는 이를 “우정과 연대의 결실”이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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