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여성의 스파이 입문기… 성별분업 판타지서 벗어나
스파이로 활약하며 나대는 것에도 익숙해져

 

수잔은 스파이로 활약하며 나대는 것에 익숙해진다. 이 과정에서 그녀를 성장시키는 것은 여성 상사, 여성 동료, 여성 악당이다.
수잔은 스파이로 활약하며 나대는 것에 익숙해진다. 이 과정에서 그녀를 성장시키는 것은 여성 상사, 여성 동료, 여성 악당이다.

‘스파이’는 재치 있고 영리하며 젠더와 코미디에 대한 세심한 성찰을 하고 있는 영화다.

한국 배급사가 택한 메인 포스터나 줄거리를 보면 스파이 업무와 상관없이 살았을 것 같은 평범한 여성이 스파이가 되고, 그 양 옆에 프로페셔널한 두 남성이 그녀를 지도하고 도와준다는 것이 영화 내용일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CIA가 직장인 수잔(멜리사 매카시)은 관찰력, 직관력, 순발력, 신체 능력 등 내근 요원으로도, 현장 요원으로도 필요한 자질을 두루두루 지니고 있다. 그런 그녀가 내근직이 자신에게 잘 맞는 업무라고 생각해온 이유는 남녀 협업 관계의 성별 분업적인 판타지 때문이다.

“내 멋진 남자는 밖에서 활약하고 공을 세우고 나는 현명함과 세심함,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그를 보조한다”는 이 어리석지만 사회적으로 큰 힘을 가진 판타지는 여성들이 ‘나대는’ 것을 자의적, 타의적으로 굴복시켜 왔다. 수잔은 곧 많은 일들을 해결하고 스파이로 활약하며 나대는 것에 익숙해지고 그것이 자신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녀를 성장시키는 것은 영화 포스터의 두 남성이 아니라 여성 상사, 여성 동료, 여성 악당이다.

포스터의 두 남성은 수잔에게 유희의 대상으로서 중요하다. 동료 요원 포드의 역할은 애매모호하다. 요원으로서 하는 일은 거의 없고, 가끔 수잔이 있는 곳에 나타나 허풍이 가득 들어간 무용담을 늘어놓는 역할이다. 액션스타 제이슨 스타뎀이 남성 특유의 고압적인 허세를 잔뜩 늘어놓지만 그것이 억압이나 위협이 아닌 우스꽝스러움이 되는 것이 이 캐릭터와 그로 인한 유머의 핵심이다.

[img2]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수잔은 포드와 성관계를 갖는 사이가 된다. 현실 세계에서의 데이트 상대는 왕자님이라기보다 허세는 어쩔 수 없더라도 같이 있으면 웃기고 위협적이지 않은 남자다. 반면 파인은 모니터 속의 왕자님이다. 수잔은 파인과의 관계에서 떠받들고 보살피는 역할을 다소 과장되고 수행적으로 맡고 싶어한다. 마치 아이돌과 팬의 관계처럼. “당신을 위해 모든 일을 할 수 있으니 나에게 즐거움을 주세요.”

실제로 수잔은 지하 내근직 사무실에 처박혀 몇 년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것은 (모니터 속) 파인의 (아름다운) 존재라고 말한다. 초반 내근직 사무실은 여성들이 다수인 콜센터 사무실이나 여학교를 연상시키도록 연출됐다. 같이 박쥐를 잡기도 하고, 케이크를 나눠 먹거나 몰래 수다를 떤다. 왕자님과의 데이트를 상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꼭 그렇게 될 필요는 없다. 친구들과 각자의 모니터 왕자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더 즐겁다는 것을 알고 있는 수잔은 파인의 저녁식사 제안을 거절하고 친구들을 챙기러 간다.

또 수잔은 이전에 멜리사 매카시가 감독 폴 페이그가 짝을 이뤄 성공한 여성 코미디 영화들에서 그녀가 연기했던 캐릭터들과 비교했을 때 흥미로운 발전을 보인다. 전작들에서 그녀는 또래 여자들의 문화와는 멀리 떨어져 신체를 수련하거나 폭력, 살상무기에 집착하는 등 독특하고 고정된 성 역할과는 다르기는 하지만 누가 봐도 기괴한, 그녀의 ‘사이즈’에 기반해 다른 여성들과의 차이점을 더욱 부각시키는 여성을 연기했다.

하지만 ‘스파이’에서 수잔은 특별하게 보이기 위해 통상적인 ‘여성성’을 지워낸 캐릭터도 아니며, 동시에 그 통상적인 ‘여성성’으로 포섭 가능한 캐릭터도 아니다. 모든 여성들이 ‘여성성’과 가지는 관계가 그러하듯이.

‘스파이’의 한국 배급사는 젠더적으로 풍부한 이야깃거리가 담긴 이 영화의 자막 번역을 엉뚱하게도 반여성적인 유머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의뢰해 영화의 장점을 망쳐놓았고, 논란이 됐다. 자막 논란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배급사가 져야 하는 것이 맞지만, 동시에 여성성의 과장이나 비하 없이는 여성이 전면화되는 코미디를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반성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