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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32), 이경림(51) 여성 시인 2인의 시집 〈그곳이 멀지 않

다〉,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가 나란히 출간되어 불황 속의

출판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이들 시인의 신작은 각기 다른

양상으로 여성성의 새로운 지평과 힘을 조망한다.

첫시집 〈뿌리에게〉, 두번째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이

후 3년만에 선보인 나희덕씨의 〈그곳이 멀지 않다〉는 다작을 하지

않는 시인의 쉬우면서도 절제된 시어들이 단연 돋보인다.

앞서의 시집들에서 전교조교사로서의 체험과 아이 둘을 둔 모성 체

험이 잘 드러났다면, 신작은 좀더 넉넉한 모성과 인생을 마주하는

성숙한 시선으로 일상의 고통들을 끌어안고 승화시켜 나가는 과정

을 잘 보여준다.

‘나는 탱자 꽃잎보다도 얇아졌다/ 누구를 벨지도 모르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탱자 꽃잎보다도 얇은’ 부분)에서 처럼

‘나’는 외부에 의해 살이 저며지듯 얇아지고 있으며, 자신의 마

음을 자꾸 베게 하는 칼날을 기르고 있다. 마음 속에 칼날 하나를

벼리고 있는 시인은 칼날을 밖으로 겨누기 위해서라기 보다 그 고통

들을 감내하며 자신을 다그치고 추스리기 위한 것이다.

그런 관용의 마음은 고통과 상처마저도 미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넉넉함으로 드러나며 더 큰 사랑과 이해의 세계로 나아간다.

‘아무도 따가지 않은/ 꽃사과야,/ 너도 나처럼 빚 갚으며 살고 있구

나./햇살과 바람에 붉은 살 도로 내주며/ 겨우내 매달려 시들어 가

는구나.월급 타서 빚 갚고/ 퇴직금 타서 빚 갚고/ 그러고도 빚이

남아있다는 게/ 오늘은 왠일인지 마음 놓인다.

빚도 오래 두고 갚다보면/ 빛이 된다는 걸/ 우리가 조금이라도 가

벼워질 수 있는 건/ 빚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걸/ 너는 알겠지,/

사과가 되지 못한 꽃사과야.

그러고도 못다 갚으면/ 제 마른 육신을 남겨 두고 가면 되지./ 저기

좀 봐, 꽃사과야./ 하늘에 빚진 새가 날아가고 있어./ 언덕에 빚진

눈이/ 조금씩 녹아가고 있어.’ (‘빚은 빛이다’ 전문)

한편 이경림씨의 시는 관념이 아닌 육체성의 획득으로 인한 생동감

이 넘치는 동시에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 빗속에서 초경을 하고/ 빗속에 서 결혼식을 올리고/ 빗속에서

아이를 낳고/ 빗속에서 자궁을 들어내고/ 빗속에서 시인이 되고/ 빗

속에서 시집을 내고 빗속에서...’(‘불충실한 귀납법’부분)처럼 빗

속에서 모든 일을 경험한 화자의 여성으로서의 경험은 그리 행복

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 불행한 기억은 ‘어이 가방!’, ‘여자

들’에서처럼 자기정체성을 상실한 채 사물화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의 경험은 시 ‘꿈, 바다, 여인들’에 이르면 ‘속옷의

에미들 산을 넘어/ 산이 고쟁이 사이로 꽉 차 자꾸 자라/ 에미들

의 가랑이가 자꾸 길어져/세상이 그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과

같이 외부의 폭력마저도 순하게 길들이는 풍부한 모성의 육체로

발현된다.

에미(어머니)들의 여성성이 확장되고 힘을 얻는 것이다.

이경림 시인이 구축한 여성성 긍정의 과정은 독특하다.

“정체 모를 ‘남성’이라는 거대한 사회구조 속에서 나는 막연하게

나마 길들여지고 순응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럴수록 고개를 드는 내

면의 목소리는 그에 대한 나의 적응 노력을 견디지 못해 삐걱거렸

고, 혼란에 빠뜨렸다.

누구보다 남성적 언어, 화법에 길들여진 나였고, 그 세계로부터 인

정을 받고 싶었던 나였지만, 그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강한

욕망 사이에서 당혹스럽고 불편했었다. 마음의 병까지 앓게 된 나를

여성으로서의 자아는 그냥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를 사랑하는 나의 자아와 화해를 하고 내 여성성을 인정하기 시작

했을 때 비로소 마음을 치유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내 언어들은 달

라지기 시작했다.”

이경림 시인의 시들은 한편으로는 거친 것 같으면서도 한없이 부드

럽고, 수다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절제되어 있다. 이는 그의 말처럼

‘여성으로서의 화법’을 체득한 시인의 거리낌

없는 시작의 단면일 것이다.

최이 부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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