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기반한 아들의 ‘아버지 살해’ 떠올려져
전복도, 패러디도 아닌 한국 영화의 어떤 곤경

 

‘차이나타운’은 두 중심 인물을 여성이 연기한다는 것 외에는 장르의 여성적 변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영화다.abortion pill abortion pill abortion pill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차이나타운’은 두 중심 인물을 여성이 연기한다는 것 외에는 장르의 여성적 변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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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차이나타운’은 오랜만에 여성 투톱 주연을 내세운 한국 영화라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관심을 모았다. ‘차이나타운’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같이 언급되는 영화들은 갱스터 필름 누아르 장르의 대표작 ‘대부’ 시리즈나 ‘달콤한 인생’ ‘아저씨’ ‘신세계’ 등 한국 갱스터 누아르의 대표작들이다.

남성이 주가 되는 장르이기는 하지만 여성 주인공의 계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 이 장르의 여성 주인공을 주제로 쓴 책을 몇 권이고 찾을 수 있으며, 가까운 예로는 2002년의 전도연, 이혜영 주연의 한국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가 있다. 그러나 ‘차이나타운’은 한국 영화에서 드물게 여성 투톱 주연인 누아르 영화임을 내세우고, 관객들도 그것을 깊이 인식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다른 여성 주연 영화를 떠올리지 못한다. ‘차이나타운’에는 사회적인 의미로든 장르적 클리셰적인 의미로든 영화의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사실, 그 ‘여성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이상하리만치 삭제돼 있다.

장르적인 관습으로도 현실에서도 누아르 장르가 다루는 거칠고 어두운 세계를 살아가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안위를 위협하는 약점으로든 스스로 활용하는 자원으로든 강하게 의식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차이나타운’의 살벌한 세계에서 일영(김고은)의 섹슈얼리티는 위협으로도, 자원으로도 드러나지 않는다. 심지어 해외에 성매매 여성들과 팔려갈 때도 일영은 성애화되지 않으며, 그녀를 ‘여자’라고 무시하는 장면조차 나오지 않는다.

‘엄마’(김혜수)의 카리스마 역시 마찬가지다. ‘엄마’라고 불리고 영화 말미에 일영을 딸로 입양한 사실이 밝혀지지만, 진심으로든 아니면 그 세계에서 ‘패밀리’를 운영하기 위한 명분이든 ‘모성’은 이 ‘엄마’의 힘과 관계가 없다. 한편 여성 중심 장르영화에서 가장 쉽게 선택하는 ‘여성적인’ 관계는 자매애이거나 자기 희생적 모녀 관계다. 하지만 일영과 ‘엄마’의 관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기반한 아들의 ‘아버지 살해’를 떠올리게 한다. 즉, ‘차이나타운’은 두 중심 인물을 여성이 연기한다는 것 외에는 장르의 여성적 변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영화다. 그렇다고 해서 ‘전형적 여성 묘사’를 피한 전복적 영화는 아니다. 여성의 전복이 남성의 자리는 아니지 않은가?

물론 이것이 남자가 주연일 때와 똑같은 효과를 가진다는 뜻은 아니다. 같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여성’이 연기한다는 것만으로도 실제 영화에서는 관습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영역들이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진다. 일영과 엄마의 파국은 남성 간 관계였다면 호모소셜한 관계에 기반한 (아들의) ‘아버지 살해하기’로 이해됐을 것이다. 그러나 모녀 관계를 재현하는 관습과 인식 틀에는 이것이 없기 때문에 모호하게 남는다.

일영과 주변 사람들을 파멸로 몰고 간 해맑고 청순한 ‘석현’ 캐릭터는 남성 누아르 영화일 때 여성들에게 자주 할당되는 역할이지만, 그것이 성별을 바꾸었을 때 비로소 얼마나 어색하고 부당하게 보여지는지가 드러난다. 그렇다면 ‘차이나타운’은 남성 장르영화의 성별 분업의 괴상함을 알리기 위해 기획된 거대한 패러디 영화일까?

‘차이나타운’은 전복도, 패러디도 아닌 한국 영화의 어떤 곤경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한국 영화는 이제 ‘여성적인 것’을 생각하는 방법을 금지당했거나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다. 시나리오를 쓸 때, 투자자를 설득해 프로덕션을 꾸릴 때 생각할 수 있는 영화적 이야기, 미학은 남자들의 것뿐이다. 여성은, 더 정확히 여배우는 시나리오를 차별화할 수 있는 요소로서 등장한다.

한국 영화가 인식하고 있는 영화에서 여성적인 것은 스타 여배우들뿐이다. ‘차이나타운’은 여배우 캐스팅이 아니었다면 한국 갱스터 누아르들의 클리셰들을 섞어 놓은 진부한 영화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여성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가 여성을 대하는 바닥난 상상력을 드러내지만, 역설적으로 여성이 아니면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면에서 흥미로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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