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님 한 분이 손을 잡고 “아이고, 경랑이 니가 사십이 넘었다꼬…”라며 웃으신다. 당신의 말씀에서 당신도 당신의 시곗바늘을 다시 점검하고 계시리라 생각하니 또 한번 야릇해진다. 고모님의 깊어진 눈매 속에 어린 시절 나를, 지금의 나를 다 담아 계시니 그 마음은 또 어떠하시리….
부모님과 친지 어르신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제 이런저런 집안 이야기, 자식들 이야기가 무르익어 간다. 우리 시대 어르신들의 주제는 시간이 흘러도 그닥 변하지를 않으니 당신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대개는 다 자식, 손주들의 근황이고 그것도 아니면 더 큰 세상, 정치·경제 이야기이니 그 역시 마음이 아련하다. 세월이 흘러 당신들은 무엇이 달라졌고 뭐가 행복한지는 말씀하지 않으신다. 이야기꽃은 어김없이 필자에게로 돌아오고 이것저것 물으시면서 이야기를 이어가신다. 어렸을 때는 “그래, 공부는 잘하제?” 물으시더니 이제는 “그래, 김서방은 잘 있제? 큰애가 몇 학년이더라?” 하신다. 그리고 아마도 슬그머니 얼굴빛을 보고 나의 근황을 점쳐보고 계시리라. 사는 동네가 어딘지, 일은 아직도 하는지, 몇 가지만 척척 물으시면 도사가 다 되셔서 얼굴이 훤하다고 혹은 고생한다고 금방 마음속에서 점수판을 들었다 놨다 하실 게다.
사십이 넘어 시곗바늘의 속도가 광속으로 늘어나 있는데도 어르신들을 뵙고, 친척 언니, 오빠들을 만나면 철없던 어린 학생 시절의 내가 다시 깨어나는 것 같다. 아직도 나는 무언가가 아직 덜 된 것 같다. 다시 내가 무언가를 시작하고 아직도 계속 무언가가 되려고 하는 것을 검증하는 시간이라는 뜻인가 보다. 그 어떤 동기 부여 강좌나 책을 보는 것보다 더 강렬하게 나를 돌아보고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그래, 기왕이면 좀 더 뜻깊은 사람이 돼야겠다. 아직도 더 바랄 것이 많은 자식으로 우리 부모님에게 더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고 싶다….’
평상시 효녀는커녕 스스로 불효녀라 생각하는 내게 이런 느낌은 마치 에너지 드링크를 마신 느낌이랄까. 내 자식에게 자랑스러운 부모가 되겠다는 마음보다 아직 부모님께 어느 모임 자리에서나 슬쩍 자랑할 수 있는 자랑거리를 안겨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간절한 것은 필자가 아직 철이 덜 들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이제야 철이 들고 있다는 증거일까?
어렸을 때와 달리 변한 것이 있다면 예전보다 그 느낌이 더 오래간다는 것, 그 느낌에 마음 한편이 아려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이런 마음을 한번도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무뚝뚝한 여식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5월 가정의달에 내 자식 생각만큼만 부모님도 생각하는 그런 날들이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