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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나는 할머니 손에 키워졌다. 시각장애인 남편을 둔 엄마가

늘 바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손발 노릇하랴, 집안일 하랴 엄마는 하

루종일 바닥에 엉덩이 붙일 틈이 없었다.

그래서 유년기의 내 어머니는 엄마가 아니라 사실 외할머니였으며, 동

네아줌마들, 옆집 또래 친구의 엄마와 할머니였다. 매일 밤 나는 외할

머니의 옛날이야기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고, 낮엔 할머니하고 시장

을 돌아다니며 세상구경을 했다.

마흔이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도 슬프고 힘든 일이 생기면 속으로 ‘할

머니...’하며 울먹인다. 할머니 냄새가 그립고, 할머니의 편안하고 조

용한 목소리며 나를 바라보던 따뜻한 눈길이 그리워서다. 엄마는... 늘

화가 나 있었으며 나만 보면 야단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엄마가

무서웠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또 새로운 엄마가 생겼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

임 선생님,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 선생님이었지만 학교에 가면 늘 따

뜻하게 안아주고 칭찬해 주고 사랑해 주셨다. ‘엄마’처럼.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학교에서 ‘엄마’를 찾았다. 때로

는 선생님에게서, 때로는 친구에게서 엄마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20대가 되어서는 늘 엄하고 무서웠던 엄마와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아주 격렬하게. 공부하라면 놀고, 청소하라면 나가버리고, 잔소리하면

귀를 막았다. 으... 정말 악랄한 딸 노릇을 했다.

서른이 넘어 엄마가 더 이상 나에게 결혼하라는 말을 하지 않을 때

결혼을 했다. 그리고 몇 년 후 딸을 낳았다. 나하고 생긴 것도 똑같고

하는 짓도 똑같은 그런 딸을. 엄마가 화가 날 때마다 나에게 했던 말

대로다. “너하고 똑같은 딸년 하나 낳아서 키워 봐라!”

애 낳고 나서 엄마의 산 바라지를 받는 동안 우리 모녀는 아주 많이

친해졌다. 엄마가 어떻게 해서 시각장애인인 아버지와 결혼하게 되었

는지, 엄마의 유년기와 청년기의 에피소드, 그리고 실은 나에게 정을

쏟지 못한 것이 이제 회한이 되어 가슴아파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엄마랑 다른 이유에서지만 나도 딸을 전적으로 키울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딸을 낳고 한 달도 채 지나기 전에 일터로 나가야 했고, 외

할머니가 나를 키웠듯, 엄마가 딸을 키웠다. 엄마는 나 대신 날마다 전

쟁을 치뤘다. 아버지 수발도 들어야 했고 갓난아이도 돌보아야 했다.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여자의

업보를 ‘엄마’에게 떠넘기고 있구나...”

그래서 공동육아를 시작했다. 엄마는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애를 맡

기냐면서 걱정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를 키워준 수

많은 엄마들 덕분에 내가 원하던 사랑을 주지 못했던 엄마를 이해할

힘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원하고 바라던 엄마의 사랑

이란 건 어느 한 사람에게서 완전히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돌도 채 안된 딸애를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었

다. 타인의 양육, 엄마의 양육. 때론 엄마가 타인일 수도 있으며, 타인

이 엄마가 되 주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만이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아이나 엄마 모두 세

상과 단절하게 만드는 강요된 이데올로기일지 모른다. 엄마는 신이 아

니다. 엄마는 강철이 아니다. 엄마는 인간이다. 일하는 엄마, 몸이 약한

엄마, 그리고 양육이 체질에 안 맞는 엄마들은 엄마가 아닐까? 모든

생물학적 엄마가 다 천부적인 양육능력을 타고 난 것일까?

나는 위의 세 가지 요소를 다 갖춘 엄마다. 몸이 약하고, 양육이 체질

에 안 맞는, 일하는 엄마. 만약 이런 내가 딸애와 24시간을 함께 보낸

다면... 지금보다 더 딸애를 사랑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고 해서 질적으로 더 좋은 관계가 된다는 보장이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이 엄마가 키우는 아이들보다

발달속도가 느리고, 건강상태도 좋지 않으며 감정적으로 불안하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하루종일 아이들에게 비디오나 틀어주는 어린이

집이 있다던데... 그런 어린이집에서라면 아이는 별로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루종일 신경질 내고, 아이에게 비디오 틀어주고, 엄마

아빠가 싸우고, 늘 찌푸린 표정의 엄마 눈치를 보면서, 집에만 있어야

하는 아이도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스스로 커 가는

능력’이 있다. 적절한 환경만 주어진다면, 적절한 애정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아이는 자기답게, 안팎으로 성장해 나간다.

내 어머니는 누구일까? 나를 낳아준 어머니, 나에게 입을 옷과 먹을

것을 준 어머니, 나에게 사랑을 준 어머니, 나에게 믿음을 준 어머니,

나를 공감해 준 어머니, 나에게 삶에 필요한 지식과 지혜를 전해준 어

머니.... 우리는 우리의 자식들에게 어떤 어머니로 살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 아이에게 이 모든 것을 다 해 줄 수 있는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못해 주는 것을 해 줄 수 있는 ‘타인의 양육’에 기대어

산다. 내 아이는 그 그늘 아래 더 많은 관계들과 만나고 경험하면서,

나하고 단둘이 지내는 것 보다 훨씬 더 큰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을 믿

어 의심치 않으면서.

이숙경/ 한 아이의 엄마로서 사이버상에서 활발한 ‘아줌마운동’과

출판기획 활동 등을 하는 자칭 ‘아줌마 페미니스트’.

chuuuk@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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