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 강의 녹취록 재구성… “통일은 대박”론은 패권주의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10년 만에 신작 『담론』을 냈다.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가 붙었다.
그는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사형을 선고받고 20년 20일간 무기징역수로 감옥생활을 했다. 1988년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고 이듬해 성공회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아쉽게도 지난해 겨울 학기를 마지막으로 강단에서 그를 만날 수 없다. 그의 강의는 공감과 소통, 위로의 에너지가 넘쳐났다. 마치 ‘여럿이 함께 가는 여행’ 같았다.
책은 성공회대 강의 녹취록을 토대로 저자가 수정하고 보충했다. 물 흐르듯 담담한 『담론』에 대해 유홍준 명지대 교수는 “잔잔하면서도 유유히, 도도하게 흘러가는 문체”라며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역시 사색의 힘이고 문장의 힘”이라고 말했다.
“돕는다는 것은 비오는 날 우산을 함께 쓰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는 것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이다. 저자는 ‘함께 맞는 비’라는 화두를 세상에 던졌다. 이것 역시 동양고전의 관계론과 비슷하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강의』에서 동양고전을 어떻게 이해할지 탐색했다면 둘이 합쳐진 책이 바로 『담론』이다.
저자는 『담론』에서 동양고전 독법을 통해 관계론의 사유로 세계를 인식한다. 그는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가 상품 교환이라는 형식으로 연결돼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러면서 “얼굴 없는 인간관계, 만남이 없는 인간관계란 사실 관계없는 것과 다르지 않는다”며 “우리 시대의 삶은 서로 만나서 선(線)이 되지 못하고 있는 외딴 점(點)”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맹자』에 ‘곡속장’ 예화가 나온다. 전국시대 제나라의 선왕이 제물로 끌려가는 소를 보고 그 소가 불쌍해서 양으로 바꾸라고 했다는 일화다. 왜 소를 양으로 바꾸라 했을까? 그 이유는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이며, 보고(見), 만나고(友), 서로 안다(知)는 것이다. 즉 관계다.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는 바로 만남이 없기 때문이다. 식품에 유해물질을 넣을 수 있는 것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을 훨씬 뛰어넘는 곳에 있다”고 했다. 서로를 따뜻하게 해 주는 관계, 깨닫게 해 주고 키워주는 관계가 최고의 관계라는 것이다. 그는 특히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일이다. 사람을 키워내는 것으로 절망과 역경을 극복하는 것이 석과불식(碩果不食)의 교훈”이라며 “이것이 최고의 인문학”이라고 말했다.
특히 통일(統一)은 통일(通一)로 충분하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평화 정착과 교류 협력, 그리고 차이와 다양성의 승인이 바로 통일(通一)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언급한 “통일은 대박”이라는 관념은 패권주의이자 지극히 경제주의적 발상이며, 그 근본은 동(同)의 논리라고 저자는 일침을 가했다. 대통령의 말처럼 통일이 대박처럼 갑자기 다가올 때 오히려 파탄이고 충격이라는 지적이다.
책에는 선생이 교도소에서 만난 많은 재소자들의 삶이 적혀 있다. 그와 함께 나란히 떡신자로 이름 날린 창신꼬마, 밤중에 몰래 건빵을 먹던 조 목사, “이론은 좌경적으로, 실천은 우경적으로”라는 놀랍도록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장기수 노인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그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비극의 주인공’ 나팔수 이야기, 물 섞인 피를 헌혈했다고 끝끝내 양심에 가책을 받던 재소자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이 소개돼 흥미를 더한다. 검열필 편지 속에 미처 쓰지 못한 말들이 담겨 있어 그의 자전과 같다는 평을 듣는다.
그에게 독방에서의 사유는 철학 교실이었고 감옥은 사회학 교실, 역사학 교실, 최종적으로는 인간학의 교실이었다. 수많은 재소자들의 삶을 자신의 목발 삼아 걸었고, 인간을 이해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눈을 갖게 됐다. 그가 감옥을 ‘나의 대학 시절’이라 술회하는 이유다.
그렇다 해도 무기수가 된 사상범의 고통이 어땠을지 우리는 상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절망의 끝에서도 그는 생명을 버리지 않았다. 10년 차 동료 재소자가 한밤중에 화장실에서 손목을 긋고 죽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에게 되물었다고 한다. “나는 왜 자살하지 않고 기약 없는 무기징역을 살고 있는가?” 뜻밖에 그를 살린 것은 햇볕이었다. 길어야 2시간밖에 못 쬐는 신문지 크기만 한 햇볕을 무릎 위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은 살아 있음의 어떤 절정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