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 중 『서른 살 심리학』 시리즈 등 여섯 권 책 쓴 베스트셀러 저자
나는 집을 지고 다니는 달팽이… 가족에게 유쾌한 짐 되고 싶다
때론 버티는 게 인생… 하나의 문 닫히면 다른 문 열려요

 

김혜남 정신분석 전문의는 10일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파킨슨병 환자들이 나를 통해 희망을 얻었다는 말에 기쁘다”며 “파킨슨병은 기분이 좋으면 증상이 호전되고 우울하면 증상도 나빠진다. 투병 사실을 공개한 게 잘한 것 같다”고 말했다.free prescription cards cialis coupons and discounts coupon for cialis
김혜남 정신분석 전문의는 10일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파킨슨병 환자들이 나를 통해 희망을 얻었다는 말에 기쁘다”며 “파킨슨병은 기분이 좋으면 증상이 호전되고 우울하면 증상도 나빠진다. 투병 사실을 공개한 게 잘한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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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누군가는 파킨슨병을 묘사할 때 “온몸을 밧줄로 꽁꽁 묶어 놓곤 움직여 보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파킨슨병은 뇌 조직이 손상돼 손발이 떨리고, 근육이 뻣뻣해지고, 몸이 굳고, 말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 신경퇴행성 질환이다. 우울증과 치매를 동반할 뿐 아니라 발병 후 15~17년쯤 지나면 사망이나 심각한 장애가 나타난다고 알려진 불치병이다.

내가 희망의 아이콘이라면서요?

정신분석 전문의 김혜남(56) 박사가 15년째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사람들은 두 번 놀랐다. 병이 위중해서도 놀랐지만 그를 베스트셀러 저자로 만든 다섯 권의 책이 파킨슨병으로 투병하던 중에 나왔다는 데 감동을 받았다는 독자들이 많다.

6년 만의 신작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갤리온)에서 파킨슨병 투병 사실을 공개한 그를 서울 역삼동 자택에서 만났다. 하필 ‘세계 파킨슨병의 날’(4월 11일) 하루 전인 10일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그가 계단을 디뎌 내려가는 모습은 불편해 보였다. 뻣뻣한 팔을 뻗더니 찻잔을 꺼내 직접 커피를 끓여 내놓았다. 생각보다 상태가 나빠 할 말을 잊었다. 그런데 그는 유머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내가 요새 희망의 아이콘으로 떴다. 난 유치하고 미숙한 면이 많은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신비주의로 가야 할 것 같다.” 그러면서도 “파킨슨병 환자들이 나를 통해 희망을 얻었다는 말에 기쁘다”며 “파킨슨병은 기분이 좋으면 증상이 호전되고 우울하면 증상도 나빠진다. 투병 사실을 공개한 게 잘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1월 병세가 악화되기 전까지 환자를 진료해왔다. 자신을 진료해주는 의사가 파킨슨병인 줄 알면 환자들이 선입견을 가질까봐 투병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그는 “의사 역할을 손에서 놓고나니 공개 못 할 것도 없겠다 싶었다”고 했다.

-26일 오후 2시 교보문고에서 독자 강연도 한다고 들었다.

“체력이 한 시간 이상 버텨주지 못할 것 같아 걱정된다. 그래도 독자들과 주고 받는 강연을 즐기니까 괜찮을 것 같다.”

-투병 중에 어떻게 책을 썼는지.

“작년 가을 이후 조금씩 상태가 좋아져서 책 쓸 만큼 사람꼴이 됐다. 남편(장일태 나누리병원 이사장)과 손잡고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며 늘 감사해하며 지내고 있다. 아마 파킨슨병을 앓지 않았으면 책을 안 썼을 것이다. 애들 데리고 미국에 다녀온 후 정신분석가로 지냈을 테니까…. 병에 걸려 유학을 못 가면서 대중에게 말 걸기로 방향을 틀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건넨 말은 위로가 됐고 치유가 됐다.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가 60만 부 판매된 것을 비롯해 다섯 권이 도합 120만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정작 그는 ‘청춘의 멘토’란 별칭이 부담된다며 “누가 날 작가라고 부르면 굉장히 어색하다. 그래서 책 한 권 쓸 때마다 절필을 선언한다. 여섯 번째 책이 오랜만에 나온 것도 ‘젊은이들의 주치의’란 타이틀이 부담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파킨슨병은 어떻게 알게 됐나.

“밥을 조금밖에 못 먹고, 글씨를 쓰는데 자꾸만 글씨가 작아지고, 저녁이면 오른쪽 다리를 끌고, 불안 증상도 보였지만 피곤해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개인 병원을 차린 지 1년이 채 안 됐을 때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더라. 처음 한 달은 억울하고 세상이 원망스러워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봤다.”

30년간 환자들의 마음을 돌보며 열심히 달려왔다. 첫아이를 응급실 환자를 돌보다 유산하곤 절망에 빠졌지만 잘 이겨내고 두 아이를 낳았다. 시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일하랴 아이 키우랴 힘들었지만 꿋꿋하게 살았다. 그런 자신이 불치병에 걸리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아니,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나는 그대로인데, 달라진 게 있다면 내 미래가 불확실하고 현재가 조금 불편해진 것밖에 없는데….’

그래서 일어났고 하루를 살고, 또 다음 날을 살았다. 환자를 진료하고, 강의를 나가고, 시부모와 남편과 아이 둘을 돌보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도파민 작용제는 보통 치료 효과가 3년 가는데 그 약으로 12년을 버텼고, 병이 악화되기 전까진 진료와 강의도 계속할 수 있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자택에서 만난 김혜남 정신분석 전문의는 파킨슨병 환자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유쾌했다. 그는 “유머로 병을 껴안지 않으면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했다.sumatriptan 100 mg sumatriptan 100 mg sumatriptan 100 mg
서울 강남구 역삼동 자택에서 만난 김혜남 정신분석 전문의는 파킨슨병 환자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유쾌했다. 그는 “유머로 병을 껴안지 않으면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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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내 별명이 ‘스리 아워 우먼’ 된 사연

그는 인터뷰를 하던 중 자꾸 몸을 움직였다. “약의 부작용으로 가만 있지를 못한다”며 이상운동증 증상이라고 했다. “내가 나에게 붙인 별명이 ‘스리 아워 우먼(3-hour woman)’이다. 약을 먹으면 세 시간은 괜찮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투 아워 우먼(2-hour woman)’까지 갔다.” 상태가 나빠졌을 땐 2층 옷방까지 기어가는 데 30분이 걸렸다. 밤에 자면서 다리를 1㎝조차 움직이지 못해 팔순의 엄마에게 ‘엄마, 다리 좀 1㎝만 돌려줘’ 부탁했을 정도였다. 다행히 요즘은 아무 것도 못하는 ‘오프(OFF)’ 상태가 약하게 오거나 거의 오지 않고 있다. 그는 “때론 버티는 것이 인생의 답”이라며 “버티는 시간 동안 우리는 그 일의 의미와 절박성을 깨닫고 필요한 것을 재정비하며 살아남는 법을 익힌다. 버텨서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폄하할 수 없는 피땀 어린 노력의 결실”이라고 했다.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쳐올 때가 있다. 누구는 직장을 잃고 누구는 파킨슨병에 걸린다.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 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는 자신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파킨슨병에 걸린 후 집을 지고 다니는 달팽이가 된 기분이다. 내 몸이 집이고 내 머리가 이걸 끌고 가는데 옛날에는 몸이 머리를 받쳐서 끌고 갔다면 요즘은 머리에서 명령을 내려도 몸이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오른쪽 다리가 먼저 약해졌다. 그런데 튼튼한 왼쪽 다리에 힘을 줘서 움직이니 오른쪽 다리가 같이 따라가더라. 그때 새삼 깨달았다. 약한 부분인 단점을 고치려고 애쓰기보다 강한 부분인 장점에 집중해 그걸 강화시켜야 하더라.”

이뿐 아니다. 파킨슨병을 앓은 후 천천히 걷거나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멍 때릴 자유’를 얻었다. 세상을 구석구석 바라보며 물방울 하나하나에 소우주가 하나씩 담겨 있는 걸 알게 됐다. ‘마이크로 월드’를 발견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힘도 더 커졌다.

-책에 버킷 리스트가 실려 있던데.

“그림 그리기, 남편과 무인도에 들어가 일주일 지내기, 세상의 모든 책 읽어보기 등 10가지를 최근 작성했다. 나는 인생을 숙제처럼 여기고 스스로 닦달하며 살아왔다. 앞만 보며 달려오다 보니 정작 누려야 할 삶의 즐거움을 놓쳐 버렸다. 하지만 완벽한 때란 없더라. 불행한 완벽주의자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축제처럼 인생을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다. 삶과 연애하라는 단 한마디를 하고 싶어 책을 썼다.”

그는 “아이를 키우는 일도 아이와 같이 추는 왈츠”라며 “그걸 놓치고 매번 공부 문제로 씨름하고 싸우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일도 마찬가지다. 늘 비교하고 경쟁하고 긴장 속에서 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축제는 준비 기간이 길다. 사흘간의 축제를 위해 우리는 일 년을 준비한다”며 “그것이 바로 삶”이라고 했다.

-여성들은 누구의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딸로 살면서 의무감에 치여 산다.

“처음에 책을 쓴 후 지인들에게 사인본을 주는데 부부 모임에서 만난 여성들끼리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20년간 같이 여행 다녔는데 누구 부인, 누구 엄마로만 알고 지낸 거다. 이름을 잃어버리고 사는 여성들이 많다. 자기를 잃지 말고 자기를 지키면서 살아가야 한다. 아버지의 역사, 남편의 역사를 그만 쓰고 자신의 역사를 써야 한다.”

 

김혜남 정신분석 전문의는 “하나의 문이 닫히면 하나의 문이 열린다”며 “직선 코스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버린다면 두려움을 가질 이유가 없다. 용기 내서 일단 한 발짝만 떼면 된다”고 말했다.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http://lensbyluca.com/withdrawal/message/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cialis coupon free discount prescription coupons cialis trial coup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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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틀린 길 없어… 한 발짝만 떼는 용기를

서울 출생인 그는 다섯 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나 항상 사랑을 그리워하며 갈구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갑자기 “셋째 딸이 왜 효녀가 되는지 아느냐”고 기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부모들은 셋째까지 딸을 낳으면 실망감으로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아이는 자라면서 “왜 나는 사랑을 못 받을까” 고민하게 되고 내면에는 분노와 원망이 켜켜이 쌓인다. 그 죄책감을 보상하기 위해 효녀가 된다는 것이다.

셋째 딸인 그도 늘 주눅든 상태로 성장했다. 자신은 사랑받을 만한 매력이 없다고 여겼다. 집안에서 사랑을 독차지한 건 쌍둥이처럼 커 온 둘째 언니였다. 두 사람은 극과 극이었다. 그는 내성적이고 수줍어했으나 언니는 당당하고 활발했다. 언니에 대한 선망과 질투로 가끔 아무도 모르게 언니의 불행을 상상했다. 그런데 언니가 고2 겨울방학 때 갑작스럽게 죽었다. 그는 자신의 탓이라고 여겼다. 역사학자가 되겠다고 동생과 한 약속을 지키려고 언니가 선택한 대학 예비소집일에 교통사고가 났다.

자신의 투병 사실을 이야기하면서도 내내 담담하던 그가 언니 얘기를 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솔메이트였던 언니와의 결별은 30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씻을 수 없는 내상을 입혔다. 그리고 언니가 떠난 후 한 달 만에 할머니까지 돌아가셨다.

“가장 예민한 청소년기에 언니와의 이별을 경험했다. 밤마다 악몽을 꾸고 가위 눌리다가 주말이 되면 언니 영정을 모신 사찰에 갔다. 방에는 다 죽은 사람들 사진뿐이었다. 산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고3 수험생이 되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언니를 대신해 두 사람 몫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가 살아 있는 이유의 전부였다.”

고려대 의대를 마친 후 그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국립서울정신병원 정신분석 전문의로 일했다. 정신분석학은 내면의 깊은 상처를 정면으로 보게 만들었고 언니의 죽음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는 “하나의 문이 닫히면 하나의 문이 열린다”며 “나 역시 인생에서 그런 경험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의대에서 6년간 치열하게 공부했고 인턴 과정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으니 당연히 대학병원에 남아 전문의를 딸 걸로 생각했다. 그런데 밀려났다. 여자를 뽑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생이 끝난 것 같았다. 국립병원에 가던 날 펑펑 울었다. 내가 왜 이런 병원에 와서 트레이닝을 받아야 하나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그게 나한테는 기회였다. 약물치료뿐 아니라 사이코드라마, 예술치료, 정신분석을 골고루 접하며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그는 “세상은 끝까지 살아봐야 한다”며 “틀린 길은 없다. 실패를 하더라도 실패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면 그것은 더 이상 실패가 아니다. 직선 코스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버린다면 두려움을 가질 이유가 없다. 용기 내서 일단 한 발짝만 떼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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