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에 현악 4중주, 마임 곁들인 퍼포먼스 토크
“사적 세계와 일터, 제3의 공간 어우러져야 인생 풍요로워져”
“최근 급식비 막말 사건부터 이슬람 테러까지 미시적인 영역부터 거시적인 체제 문제까지 우리 일상에는 모욕이 만연해 있어요. 모멸감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입니다. 분노나 슬픔과 달리 드러내기도 어렵죠. 의도적인 야유도 있지만 무심코 한 행동이 모멸감을 일으킬 때도 많아요.”
9일 밤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 여해문화공간에서 열린 『모멸감』 북콘서트 현장. 이 책의 저자인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가 “대화 도중 시계를 자꾸 보거나 ‘치∼’ 하고 한마디만 해도 모멸감을 줄 수 있다”고 말하자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한국출판문화상 수상작 선정을 기념해 ‘모멸사회, 마음은 어떻게 움직이는가’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북콘서트는 200석 객석이 꽉 찰 만큼 성황을 이뤘다. 책 이야기와 현악4중주, 팬터마임을 엮은 퍼포먼스 토크에 관객들은 열띤 호응을 보냈다. 특히 여성들의 호응이 뜨거웠다. 친구들과 함께 왔다는 이은숙(58)씨는 “책 이야기에 마임과 음악을 곁들이니 시너지 효과가 크다”며 흥미로워했고, 후배와 함께 온 김경자(58·부천 생명의전화 자원봉사자)씨는 “저자가 관객들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눠 공감이 더 컸다”고 말했다.
2시간가량 진행된 북콘서트의 시작은 콰르텟 트리니티의 ‘사라방드: 시를 좋아하시나요?’였다. 지휘자는 유주환씨. 그는 김 교수의 원고를 읽고 10곡의 현악 4중주곡을 작곡했다. 책에 부록으로 음반이 담겨 있다. 연주와 함께 한국영성예술협회 예술감독으로 있는 조성진 마임아티스트가 ‘모욕의 응어리’ ‘가위눌림’ ‘주차 위반’ ‘작은 자의 이웃’ ‘정성’ ‘계란 한 알’ 등을 제목으로 한 짤막한 마임을 연주와 함께 선보였다. 조씨는 “마임이 어설플 땐 음악에 집중하고, 음악이 지루하면 저를 보세요”라고 말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이야기는 ‘표정이 가면이 될 때’ ‘존엄의 역설’ ‘위로와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낯선 자들이 나누는 선물’이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김 교수는 “표정은 마음과 같이가야 한다. 마음이 없으면 얼굴에 경련이 일어난다”며 “감정노동자들은 상대가 죽이고 싶도록 미운 기분인데 웃는 표정을 지으니 감정 부조화로 탈진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모욕을 당하면 내면의 공감 본능 스위치가 꺼진다’는 경제학자 제러미 리프킨의 말을 인용해 모멸감으로 공감 능력의 회로가 끊어질 때 공격적인 성향이 극대화된다고 말했다.
김 교수와 20년간 인연을 이어온 두 예술가의 참여로 북콘서트는 내내 유쾌했다. 유씨는 “음악이 결합된 사회과학 책이 없다. 경복궁역에서 저녁식사를 하다 덥석 먹은 셈인데 사실 이 정도까지 책이 잘될 줄 몰랐다(웃음). 나는 김 교수님이 차려놓은 밥상에 수저 하나 놓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모멸감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 교수는 가면을 자기 얼굴로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자존감은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 내가 남을 어떻게 대하느냐,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올라가기도, 내려가기도 하지요. 세 가지가 실은 순환 구조입니다. 자신에게 친절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에게도 친절을 베풀 수 있어요. 또 내가 나를 대하듯 남을 대해야 자존감이 높아져요. 자신이 별볼일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닫고 스스로 낮출 때 역설적으로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어요.” 그는 “서울대병원에서 주말 15분 진료를 실험했는데 의사가 정성껏 환자를 진료하니 자부심이 강해졌다고 하더라”며 “아이의 자존심을 키우려면 ‘넌 괜찮은 애’라고 말만 할 게 아니라 사회에 기여하고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로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또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존엄을 잃으면 소용 없는 존재”라며 영화 ‘쇼생크 탈출’의 한 장면을 영상으로 틀어줬다. 영화에서 주인공 앤디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교도관들 몰래 틀어주는 장면이다. 지옥 같은 교도소 안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며 수감자들은 한순간 자유를 만끽한다.
또 호주에서 히잡을 쓴 여성에 대해 공격이 가해지자 한 백인 여성이 그 이슬람 여성과 함께 걸어주겠다고 나선 일이 알려진 후 트위터에서 15만 명이 ‘나도 함께 걸어주겠다’고 한 일을 들려주며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주고 받는 선물”의 의미를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일터에서 자존감을 얻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일과 삶의 균형이 있는 삶을 원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낯선 사람들이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또 다른 영역인 제3의 공간이 많을수록 인생은 풍요로워진다. 사적 세계와 일터, 제3의 공간이 어우러져야 자존감이 높아지고 모멸감도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동호회나 종교 모임, 시민사회 영역 등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면서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제3의 공간이 국가나 자본과 맞짱을 뜰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