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착하지 않은 여자들’ 망가짐 두려워 않는 채시라, 김혜자-장미희 연대의식 볼만해
SBS ‘풍문으로 들었소’ 우아함과 속물 근성 동시에 지닌 유호정… 새로운 여성상 ‘눈길’
여자의 적은 여자다?
무수한 막장 드라마들이 심은 그릇된 인식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등장하는 전형적인 고부 갈등을 넘어서 여성과 여성이 대결하는 드라마들도 피상적으로 여성들의 관계를 그려왔다. 연기자들의 모습 또한 전형적이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변화가 감지된다. 여성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나오고 있다. 중견 여성 연기자들이 전성시대를 맞은 이유다.
채시라는 과거 우아한 여성의 면면을 이미지로 갖고 있던 배우다. 하지만 최근 그녀가 출연하고 있는 KBS ‘착하지 않은 여자들’을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은 이미지를 보인다. 사고뭉치에다 열등감 덩어리의 김현숙을 연기하는 채시라는 한 마디로 ‘망가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녀는 사랑 타령하는 여성이 아니라 자신만의 내적인 갈증을 드러내는 김현숙이라는 인물에 빙의돼 있다.
같은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는 김혜자는 ‘엄마가 뿔났다’에서 인상적이더니, 영화 ‘마더’에선 무서운 모성애를 보여줬다. 이제 이 드라마에서는 강순옥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며 여자로서의 엄마를 연기한다. 과거 ‘엄마가 뿔났다’에서 김혜자와 사돈지간으로 등장했던 장미희는 이 드라마에선 내연녀로 등장해 김혜자와 연기 대결을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구도는 단지 대결만이 아니라 어떤 여성들끼리의 연대 의식이 깔려 있다.
유호정 역시 과거에는 단아하고 단정한 이미지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녀가 최근 SBS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겉으로는 우아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속물 근성을 갖고 있는 이중적인 인물 최연희를 연기한다. 마치 지금껏 해온 우아한 이미지는 연기의 소산이었다고 말하는 듯, 그녀는 그 이미지를 순간순간 부숴버리는 ‘깨는’ 모습을 보여준다.
최근 중견 여성 연기자들이 기존의 이미지를 깨고 나와 다양한 연기를 보여주는 건 아마도 중년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과거처럼 단선적이지 않다는 방증이다. 시청자들은 좀 더 다양하고 입체적인 중년의 여성상을 보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니 채시라나 유호정, 그리고 김혜자와 장미희의 연기 변신은 이런 요구의 산물이다. 그들은 더 이상 연애의 대상으로서의 여성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족을 챙기는 안주인으로서의 여성도 아니다. 물론 이 두 요소를 어느 정도 갖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중요한 건 이들이 남성적 관점에 붙잡혀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MBC ‘왔다 장보리’ 같은 드라마에서 이례적으로 순종적인 여성상인 장보리 역할의 오연서보다 오히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악녀 연민정이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는 사실은 이렇게 달라지고 있는 여성상에 대한 시선을 반영한다. 화제 속에 종영한 SBS ‘펀치’에 등장한 신하경이라는 냉철하고 강단 있는 검사는 우리가 흔히 봐왔던 아이를 가진 중년 여성의 상과는 사뭇 다르다. 신하경을 연기한 김아중은 이 드라마를 통해 기존의 이미지를 탈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MBC의 수목드라마로 방영될 ‘앵그리맘’에서 김희선 역시 과거의 예쁜 이미지에서 벗어나 억척스런 여성상을 그릴 예정이다.
물론 드라마들은 지금껏 여성들을 중심으로 다뤄져 왔다. 하지만 그 여성들이 그려지는 시각은 남성적인 관점과 잣대 위에서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드라마들이 그리는 여성들, 특히 중년여성들은 이런 전형성에서 탈피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요한 건 이러한 중년 여성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접근 방식이 중견 여성 연기자들의 전성시대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여성 연기자들은 늘 중심에 있었다. 다만 그걸 다루는 시선이 남성적 관점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보이는 중견 여성 연기자들의 변신은 새로운 기대감을 갖게 한다. 오롯이 여성적 관점으로 다뤄지는 여성들의 모습. 그건 새로운 여성상을 가능하게 할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