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졸업 후 학사, 대학원 진학 후 석사, 마지막 긴 장정을 잘 버티고 받는 해당 분야의 학위 명칭인 ‘박사’가 어느덧 직위로 둔갑한 것이다. 사진은 상명대학교 2013학년도 후기 학위수여식 에서 졸업생들이 졸업을 자축하고 있다.
대학교 졸업 후 학사, 대학원 진학 후 석사, 마지막 긴 장정을 잘 버티고 받는 해당 분야의 학위 명칭인 ‘박사’가 어느덧 직위로 둔갑한 것이다. 사진은 상명대학교 2013학년도 후기 학위수여식' 에서 졸업생들이 졸업을 자축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한때 “우리 사회에서 가장 급진적인 운동과 모임은 ‘자식 대학교에 안 보내기’와 ‘자식을 대학교에 보내지 않기로 작정한 자들의 모임’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처럼 학력, 학벌에 대한 차별이 심각한 나라에서 그러한 경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 자체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닐까?”라는 문제의식에서 들었던 다소 엉뚱할 수 있지만 갈급했던 상상. 물론 우리나라에서 그러한 운동과 모임은 아직 구성되지 않았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한 1980년대 중반. 당시 인구 1만 명당 학사학위 취득자는 여성이 불과 22.10명, 남성은 37.00명이었다.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고졸 이하의 학력 소유자였을 때, 대학생들이 자신의 학력 신분을 드러내는 기제는 ‘학번’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가령 아이들 학부모 모임에서 자신의 나이를 이야기할 때 굳이 ‘학번’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이야기한 것일 수 있지만 당시 대한민국 국민의 평균 학력을 고려할 때 매우 경솔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어느덧 최근엔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의 70%가량이 대학(교)에 진학하고 있다. 이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을 진학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됐다. 다만 소위 ‘명문대’에 입학하기 위한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1980년대에는 가정 형편 등의 이유로 대학교 자체에 입학하고자 하는 사람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교 입학까지의 과정이 지금처럼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소자녀화되고 예전에 비해 가정경제가 나아지면서 모든 가족은 자녀를 대학교에 진학시키고자 하고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소년이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당연지사가 됐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학력 차별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최근 ‘고졸 할당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고졸에 대한 적극적 차별 해소책이 나오는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고졸’은 우리 사회에서 낙인(stigma), 주홍글씨다. 학력 차별은 교육 정도별 월평균 초임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2012년 기준 남성의 고졸 초임은 144만9213원이고 대졸 이상 초임은 248만8570원이다. 물론 여기에 성차별까지 더해 고졸여성 초임(127만5248원)은 남성 대졸 이상 초임의 51.2%에 불과하다.

이렇듯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학력 차별을 인정하고 반영하는 호칭이 있으니 이름하여 ‘박사님’이다. 물론 대학교, 학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박사학위를 취득하기까지의 긴 시간 동안 연구주제에 대한 분석력과 인내심을 요구하기는 한다. 대학교 졸업 후 학사, 대학원 진학 후 석사, 마지막 긴 장정을 잘 버티고 받는 해당 분야의 학위 명칭인 ‘박사’가 어느덧 직위로 둔갑한 것이다. 대학교를 졸업한 자에게 ‘OOO 학사님’, 대학원의 석사과정을 마친 자에게 ‘OOO 석사님’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박사과정을 졸업한 자에게 ‘OOO 박사님’이라는 호칭은 희소성과 결합한 학력 차별의 씁쓸한 뒷면이다. 나는 손발이 오글거린다. 그렇지만 전문가들은 어느덧 자연스럽게 학위의 명칭인 ‘OOO 박사님’이라는 호칭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이건 아닌데….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 때문에 개별 가정에서 너무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고, 국가는 국가대로 성과도 예측할 수 없는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다. 가령 저출산 정책의 목표는 차별 없는 사회여야 한다는 것을 왜 모를까? 나는 간절히 꿈꾼다. 지식 습득뿐 아니라 다양한 예체능 활동을 통하여 문화적 소양을 쌓을 수 있는 초·중학교. 더 깊이 있는 학문을 하고자 하는 사람만 대학교에 진학하는 사회. 고졸 학력만 갖고도 원하는 기술을 배운 후 차별받지 않으며 일하는 사회. 그런 사회에 대한 지향은 뒤틀린 공교육이 정상화되고 엄청난 비용을 들이는 사교육이 사라지며 다양한 학력의 사람들이 어울려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 손발 오글거리는 ‘박사님’이라는 호칭 좀 사라지게 하면 어떨까?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