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만들어 온라인 아카이브 통해 배포… 성폭력 판례 뒤집기 운동도
오는 6월 새 집 입주… “‘사회의 맥박’인 여성단체 돕는 시민들께 감사”

 

6년 만에 현장에 돌아온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신임 소장은 24년간 성폭력 추방 운동에 투신한 상담소의 ‘역사’다. 이 소장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는 촘촘한 운동을 하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6년 만에 현장에 돌아온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신임 소장은 24년간 성폭력 추방 운동에 투신한 상담소의 ‘역사’다. 이 소장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는 촘촘한 운동을 하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세 살배기 외아들은 누가 엄마 근황을 물으면 “우리 엄마 성폭력 다녀요” 했다. 그 아이가 스물여덟 늠름한 청년으로 자랐다. 24년이 흐르는 동안 상담소와 운명처럼 엮여 있던 엄마는 요즘 상담소로 네 번째 출근을 하고 있다. 초대 총무부터 부소장, 소장을 거쳐 도합 11년을 상근한 그가 다시 두 번째 소장직에 오른 것이다.

2일 서울 합정동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만난 이미경(55) 신임 소장은 “예전에는 성폭력방지법 제정 등 법·제도 정비에 힘썼다면 이제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는 촘촘한 운동을 할 때”라며 각오를 다졌다.

지난 1월 29일 열린 24차 정기총회에서 신임 소장에 선출된 그는 올해 세 가지 사업에 더 ‘올인’할 구상이다. 우선 성폭력 판례 뒤집기 운동이다. 이 소장은 “성폭력 수사·재판에 젠더 관점을 반영해 올바른 판결이 나오도록 하겠다”며 의욕을 보였다.

‘노상의 진상을 고발하는 일상툰’ 사업도 흥미롭다. ‘길거리 괴롭힘’ 경험을 솔직하게 터놓고 웹툰으로 만들어 온라인 아카이브를 통해 배포할 계획이다. 괴물이 저지르는 무시무시한 성폭력이 아니라 일상의 장난이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프로젝트야 많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을 생각이다. 숨가쁘게 달려선 옆도, 뒤도 돌아볼 수 없어서다. 11년째 해온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를 올해 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도 지구촌 운동가들과의 국제 연대는 힘쓸 구상이다.

그는 성폭력 추방 운동에 투신해 20여 년간 ‘강간 신화’를 깨는 데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아직 신고율은 낮고 2차 피해도 여전하다. 그는 왜 스스로 ‘행복한 힘듦’이라 부르는 이 운동에 생을 걸었을까.

“13년간 의붓딸을 강간한 아버지를 남자친구와 함께 살해한 ‘보은·진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건대책위원회 실무를 맡았어요. 당시 시민들이 종이학 수천 마리를 접어서 보내오고 법정엔 300∼400명이 몰려들었죠. 반(反)성폭력운동을 성폭력특별법 제정까지 연결시키면서 사회와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배운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어요.”

감동적인 순간도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진관씨의 아버지가 보은씨를 면회하러 가선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두렵겠지만 희망을 잃지 마라. 밥 잘 먹고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마음을 다독인 것이다. 아들을 키우는 어미 입장에서 그의 말은 큰 울림이었다. “금쪽 같은 아들을 살인자로 만들었다고 원망할 수도 있었는데….” 평범한 어르신이 가르쳐준 비범한 가르침은 고비마다 그가 꺼내 보는 보물 상자로 남았다.

24년간 차곡차곡 쌓인 상담 일지 역시 또 다른 보물 상자다. 이 소장은 “성폭력 생존자들의 상담 일지를 모아둔 보관고를 열면 진실을 밝혀달라는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했다. “성폭력 생존자들이 단지 자기 아픔만 들어달라고 우리에게 왔을까요? 여성이 마음대로 밤길을 걷는 사회, 직장에서 희롱당하지 않는 사회,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로 바꿔달라는 목소리였던 거죠.”

이화여대 여성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대 리더십개발원 특임교수까지 지낸 그는 6년 만에 다시 현장에 돌아왔다. “이 일이 내 가슴을 더 쿵쾅쿵쾅 뛰게 했거든요. 현장과 학교 사이에서 건강한 환류 역할을 하고 싶어요.”

올해 이 소장은 큰 숙제를 풀어야 한다. 오는 6월에 지하 1층, 지상 4층의 새 집에 입주하기 때문이다. 1만원씩 내는 후원 회원부터 집을 팔았는데 이득이 크게 남았다며 차액의 10%를 쾌척한 사람, 돼지저금통을 통째 들고 온 사람들의 정성으로 185㎡(56평) 땅에 튼튼한 건물을 짓고 있다. 가해자로부터 받은 합의금을 자기 같은 성폭력 생존자를 위해 써달라며 찾아온 이도 있었다. 사회적 맥박인 여성단체의 오늘을 만든 시민들의 후원은 두고두고 갚아야 할 빚이다.

그는 “1층 62㎡(19평)는 카페에 세를 준 뒤 후원이 답지해 빚을 다 갚으면 나중에는 인권나눔터로 꾸리고 싶다”며 “그런 일이 언젠가는 오겠죠?”라며 환히 웃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