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대학생’ 견우는 무색무취, ‘우렁각시’ 준수는 성적 에너지도
남자 감독들은 무능한 걸까, 상상력이 빈곤한 걸까
욕 잘 하고 술 잘 마시고 주정하는 여성 캐릭터가 로맨스물의 전형으로

 

영화는 시종일관 준수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회사 상사인 유부남의 연인인 현우를 준수는 왜 사랑하는 걸까. 누나를 가질 수 없는 소년의 환상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연애 페이스북
영화는 시종일관 준수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회사 상사인 유부남의 연인인 현우를 준수는 왜 사랑하는 걸까. 누나를 가질 수 없는 소년의 환상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연애 페이스북

영화 ‘오늘의 연애’에서 초등학교 교사인 준수(이승기)와 기상캐스터 현우(문채원)는 초등학교 때부터 집안끼리 알아온 친구 사이다.

현우는 자기 중심적이고, 욕설을 겸비한 윽박지르기와 무안 주기가 특징인 말버릇에, 슬퍼도 기뻐도 취할 때까지 마셔야 하는 술버릇을 가지고 있다. 준수는 술을 못해 콜라만 마시면서도 현우랑 같이 밤마다 술집 가는 것이 즐겁고 잔소리를 해대면서도 술 취한 현우를 챙겨서 데려오고 어지럽혀진 그녀의 집을 청소하는 것이 기쁘다.

투박한 연출, 허술한 세부 이야기들, 군더더기가 많은 주변 캐릭터나 영화상의 설정으로 인해 영화 마케팅이 내세우는 만큼 ‘썸 타는’ 설렘은 안 느껴지지만, 관객들의 집중력을 잡아두는 것이 있다면 영화 내 캐릭터와 두 주인공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대중적 이미지 간의 거리, 그리고 기존 성별 역할과의 관계일 것이다.

성실하고 선량하면서도 허점이 많은 준수는 연예인 이승기의 모범생 허당 이미지를 적극 활용한다. 그에 더해 준수는 배려 잘 하는 세심한 훈남 수준을 넘어 현우가 혼자 사는 아파트의 비밀번호를 알게 된 것에 기뻐하며 우렁각시처럼 가끔 혼자 와서 청소하고 밥상을 차려 놓고 살림살이에 대해 잔소리도 늘어놓아 현우가 가끔 ‘엄마’라고 부른다. ‘오늘의 연애’와 비교되는 ‘엽기적인 그녀’의 견우가 연애 관계에서는 우물쭈물하고 소심한 캐릭터지만 엄마의 역할을 하기는커녕 마당 쓸기도 귀찮아하는 ‘먹고 대학생’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견우가 성별이 잘 안 느껴지는 무색무취의 인물이었다면 준수는 기존의 로맨스에서 헌신적인 여성이 했던 일들을 맡아 하는데, 그것을 상쇄하기 위해서인지 성적인 에너지도 넘친다.

한편 현우의 캐릭터는 참하고 단아한 배우 문채원의 이미지를 대립적으로 활용한다. 욕 잘하고 술 잘 마시고 자주 발끈하고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현우를 연기하는 문채원을 보는 것은 흥미롭다. 문제는 순결한 성녀와 타락한 창녀의 이분법이 지겨운 만큼, 그 도식에서 벗어났다고 믿(고 싶어 하)는 한국 영화 남성 로맨스물에서 상상 속의 여성 캐릭터는 ‘욕 잘하고 술 잘 먹고 화 잘 내고, 그러나 매력적인’ 캐릭터에 고정돼 있다는 것이다.

욕을 잘 하는 것도, 술을 좋아하는 것도, 관계를 주도하는 것도 사람을 멋지게 보이게 하는 요소들이겠지만, 로맨스의 여자 캐릭터를 ‘청순 헌신’ 아니면 ‘욕하고 술주정하고 걸핏하면 화내는’ 캐릭터밖에 못 만들어 내는 것은 무능과 관찰력, 상상력의 빈곤이다. 게다가 준수는 반복해서 “여자의 마음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청순하고 순결하지 않으면, 나에게 희생적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여자’가 되어 버린다. 마음대로 되지는 않지만 알 수 없는, 즉 매력적인 여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현우는 영화 초반 회사 상사인 유부남과 연인 관계에 있고 이 관계는 영화의 상당 분량에서 현우의 마음을 지배한다(이것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여성 관객들이 가장 불편해하는 설정이기도 하다).

훔쳐보던 순결한 누나가 알고 보니 옆집 누군가 혹은 학교 선생님 누군가와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그래서 갑자기 더러워 보인다는 옛날 소설을 읽는 것 같다. 그게 사실인지 누나를 가질 수 없는 소년의 환상인지는 모르겠다.

가장 큰 문제는 빈곤하지만 그나마 성별 도식에서 벗어났다고 생각되는 설정들조차 행복한 결말을 위해 영화 말미에 수정된다는 것이다. 18년간 뒤에서 헌신하고 배려했던 준수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방법은 ‘앞에 서는’ 것이다. 그리고 현우의 정화 과정이 필요하다. 중간에 준수와 현우는 잠시 사귀게 된 것 같지만 해프닝이다. 이 사건과 결말에 준수의 고백의 차이는 현우의 지위와 자기반성에 있다. 상사와의 불륜 관계는 이미 끝났지만 뒤늦게 보도가 되면서 현우의 사회적 지위는 없어진다.

현우는 고향 제주도에 내려와 엄마에게 자신이 다시 깨끗해지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지에 대해 묻는다. 심판을 받고 ‘깨끗해져야’ 현우는 준수와 만날 수 있으며, 준수에게 ‘알 수 있는’ 여자가 된다.

영화는 시작부터 준수의 내레이션으로 현우의 성격, 현우와 준수의 관계가 제시되고 준수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마지막에 준수가 ‘남성적’ 도전 과제를 마치고 났을 때 내레이션의 목소리는 현우와 준수가 함께 하는 것으로 바뀐다. 처음부터 준수의 시각에서 진행된 이야기이기에 마지막 현우의 보이스가 정말 그녀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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