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사는 진실한 세상에서 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날이 갈수록 커진다. 이러다 잘못하면 진실을 찾아 어딘가로 훅 떠날 것만 같다. 살아본 적이 없는 낯선 곳으로 떠나기엔 내가 너무 나이 먹은 할머니라는 사실이 걸리긴 한다. 이래저래 실행이 불가능할 것 같은 소망이라 절박감이 더 크다.

내 생각에 솔직과 정직을 다른 것으로 바꾸면 ‘자연’이란 단어가 될 것 같다. 우리가 태어나 살다 가는 이 자연을 보라. 생명을 붙이고 사는 모든 것들에 자연이 사기 치고 탐욕을 부리는 걸 볼 수 있었나. 그저 반응할 뿐이다. 사람이 자기 욕심으로 자연의 물길을 잘라내면 장마철에 산사태로 반응하고 사람들의 탐욕이 개발이라는 표현으로 논과 밭, 그리고 산과 들을 아스팔트와 건물로 덮어버리면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난다. 자연의 반응이다. 자연의 필연적 반응을 ‘진실’이라고 이름 붙여 보자.

오늘도 나는 진실한 세상에서 살고 싶은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진실을 찾으려니 점점 강도가 높아가는 무한 경쟁사회, 상대적 박탈감에 내몰리는 생존의 위기감이 공기처럼 느껴져 사실 좀 두렵다. 차라리 넌더리를 낼 땐 아직 희망이 있는데 그 상태를 지나 도망가고 싶다. 내 나이로는 아직 좀 더 이 세상에서 정든 사람들과 살아야 하는데 말이다. 환멸이 깊어지면 어쩌나, 사뭇 걱정이 들지만 그래도 좋은 것들, 좋은 사람들, 좋은 관계들을 손꼽으며 희망을 말하려고 해본다.

사람 중에 자궁을 가졌고 젖을 가진 여자의 몸이 나이를 들어가며 변하는 모습은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맨 나중에 변모한 여자를 우리는 ‘할머니’라고 이름 붙여서 부른다. 할머니는 인간 생산의 모든 경험을 살아낸 사람이다. 경험을 통해 그리고 이제 자신이 생산한 것들과 이별할 시간을 느낄 수 있고 느끼는 사람이다. 바로 이 지점에 생에 대한 겸허함, 존중감 같은 감정이 자리잡지 않을까, 그런 믿음이 생긴다.

생에 대한 겸허함과 존중감으로 사물과 관계와 공동체를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삶을 살아내는 사람에겐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어리석은 욕망들이 좀 덜할 것이다. 내가 사람에게 기대하는 희망은 바로 이런, 어리석은 욕망이 사라진 사람의 마음으로 세상이 슬슬 돌아가는 것이다.

잘잘못을 가혹하게 가려내지 않고 잘잘못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 더 먼저 성찰하게 되는 생명에 대한 연민과 지혜로움, 평화와 평안은 혼자만으로는 절대로 누려지지 않는 것이니 공동체가 두루 어울려 지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래서 이웃을 다 친인척으로 여기는 너그러움과 정리 등.

이렇듯 할머니의 마음으로 공동체를 바라보고 살피지 않으면 문제점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편을 가르기 전에 전체를 아우르는 푸근함, 밥이 끓고 뜸이 들 때를 당연하게 기다려주는 넉넉함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긴요하고 절박한지!

누구는 나를 회색분자라고 할지 모른다. 혹은 힘이 빠졌다고 할는지 모른다. 늙으면 다 저렇게 되는구나, 이렇게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가 마침내 어른이 되었다고 자부한다. 자신을 어른으로 느끼게 된 나, 이제부터 나를 ‘할머니주의자’라고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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