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방치하면 누군가 죽는다
가정폭력, 방치하면 누군가 죽는다
  • 엄수아 / 여성신문 기자
  • 승인 2015.01.23 09:39
  • 수정 2018-02-05 15: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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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폭력엔 눈감는 경찰
여성의전화 “가정폭력, 가해자·피해자 분리가 우선”
여성민우회 “안산 사건은 스토킹 피해 사건”

 

경찰의 인식과 초동대처 미흡으로 가정폭력이 또 살인사건이 됐다. 19일 오전 경기 안산 주택가 인질살인 사건의 피의자 김상훈이 현장검증을 마치고 나오며 항의하는 피해자 가족을 바라보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경찰의 인식과 초동대처 미흡으로 가정폭력이 또 살인사건이 됐다. 19일 오전 경기 안산 주택가 인질살인 사건의 피의자 김상훈이 현장검증을 마치고 나오며 항의하는 피해자 가족을 바라보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가정폭력이 살인사건이 되는 일련의 흐름이 있다. 피해자가 최악의 상황에서 경찰에 호소해도 별반 뚜렷한 대안을 얻지 못하는 경우다. 경찰이 폭행 현장을 봤다면 다행이지만 피해자가 혼자 경찰에 찾아와 신고하면 현행범이 아니라 구속은 어렵다는 말을 듣게 된다. 경찰은 빈번한 가정폭력 신고에 일일이 신경 쓰지 못한다며 ‘웬만하면 알아서 해결하라’고 한다. 현 정부가 정한 4대악 중의 하나인 가정폭력의 현실이다.

지난 1월 13일 경기도 안산에서 발생한 인질극 사건도 이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질극을 벌인 김상훈(46)은 별거 중인 부인 김씨에게 지속적으로 전화를 했고 두 의붓딸이 잠시 머문 친부 집에 침입해 부인의 전남편을 흉기로 찔러 죽이고, 두 딸을 감금했다. 인질극을 벌이다 결국엔 막내딸을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피해 여성은 남편의 반복된 폭행, 강간, 성폭력 등이 자신의 딸에게까지 미치자 딸들을 데리고 집을 나와 여관으로 피신한 상태였고 경찰에 찾아간 적도 있었다.

이번 사건이 사회적 공분을 더욱 일으킨 것은 부인 김씨가 사건 발생 나흘 전 경찰서에 찾아가 ‘남편을 구속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다. 당시 김씨는 구속이 아닌 고소 절차 안내를 받았다. 해당 경찰서는 두 달 전 가정폭력 피해 부인의 신고에 미온적으로 대처해 ‘부인 암매장’ 살인사건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소속 경찰관들이 중징계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이 지역에선 가정폭력의 결과 또다시 두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2011년 10월 개정된 ‘가정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르면 현장 경찰관은 가정폭력 범죄가 재발할 우려가 있거나 긴급을 요한다고 판단하는 경우 가해자 퇴거 등 격리 조치 등을 할 수 있다. 제대로 법이 집행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당시 여관에 피신 중이던 피해자를 위해 더 적극적인 제안을 할 수 있었다. 정부는 가정폭력 24시간 긴급전화 1366을 운영하고 있고 임시 보호시설도 마련해 뒀다. 경찰청 자체에서 운영하는 긴급 임시 피난처는 물론 각종 여성단체에서 운영하는 쉼터도 있다. 경찰서에 찾아온 부인에게 당시 민원상담관이 이 같은 정보를 제공하고 경찰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면 살인사건은 막을 수도 있었다.

고미경 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가정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 분리가 우선 조치돼야 한다고 말했다. 고 대표는 “처벌법 법안에 체포우선주의를 넣어야 한다. 피해자가 신고했을 때 가해자와의 분리가 굉장히 중요하다”며 “하루 이틀이라도 분리 조치를 해야 하는데 사법체계는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 오원춘 사건 때 경찰관이 신고를 받고 조치를 안 한 이유에 대해 ‘부부싸움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며 “부부싸움은 하다 누군가 죽어도 되는 건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용인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거다. 가정폭력은 ‘칼로 물 베기’가 아니다. 방치하면 죽거나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최희진 여성의전화 인권정책국장은 “경찰에 가정폭력 사건 대응 매뉴얼이 있지만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신체적 폭력만을 중시하는 경향도 있다”며 “미국의 경우 신고를 받으면 바로 가해자를 체포하고, 체포하지 않을 경우 체포하지 않은 이유 등을 담은 증거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가정폭력 신고율은 절반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통계청의 2013년 자료에 따르면 가정폭력을 신고하는 비율은 55% 정도로 경찰에 신고를 안 하는 이유로는 ‘가족이므로(57.4%)’가 가장 많았다. 그 다음으로 ‘대화로 해결을 원해서(23.7%)’ ‘창피해서(12.5%)’ ‘신고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4.2%)’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가족 문제는 가족이 해결한다는 통념, 외부에서 도움받지 못할 거란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난 수치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는 16일 성명에서 가해 남성의 사건 후 태도를 보면 “이번 사건을 스토킹 피해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만나달라는 요구가 이뤄지지 않아 살해했다는 반응은 다른 스토킹 범죄 가해자들이 ‘사랑하기 때문에’ ‘연인 사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민우회는 “이 참혹한 스토킹 현실에서 잊지 말고 기억할 것은 ‘인질극의 끔찍함’만이 아니다. 피해자 가족 두 명이 목숨을 잃기 전부터 이미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가해자로부터 극심한 괴롭힘과 수많은 위협의 순간을 겪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라며 “이번 사건은 스토킹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무관심과 안일한 대처의 현주소”라고 말했다.

지은정 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가해자 김상훈이 부인의 외도를 주장하며 탓을 돌리는 데 대해 “사회 전체적으로 가족관계의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가족 간의 일,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로 보는 게 아닐까 싶다. 일반적으로 신고할 경우 ‘가정 내에서 알아서 해결하라’고 작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현재 미국 미네소타 주법은 경찰관이 초기 신고를 받은 뒤 24시간 전부터 상황을 주시하다 피해 상황이 인지되거나 상당한 근거가 있을 경우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어도, 즉 폭력행위가 없었다 해도 가해자의 주거를 포함해 모든 곳에서 체포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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