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 청소년 성폭력 사회적 책임 방기

 

대법원은 지난 11월 24일 중학교 2학년이었던 15세 청소녀에게 상습적인 성폭력을 저질렀던 연예기획사 대표에 대해 무죄 취지로 판결을 내리고 이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이 사건의 가해자인 연예기획사 대표는 아동·청소년성보호법상 강간 등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2년, 2심에서 9년을 선고받았던 터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연인관계로 보인다는 점을 들어 가해자에게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린 이번 대법원의 판단은 아동·청소년 성폭력 특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가해자는 2011년 8월 자신의 아들이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피해자를 만나 연예인을 시켜주겠다며 접근해 전화번호를 알아낸 뒤, 당일 피해자를 밖으로 불러내 추행한 후로 피해자에게 상습적으로 성폭력을 가했다. 결국 임신하게 된 피해자가 가출하여 가해자의 집에 머무르다 출산 후 가해자를 경찰에 신고했다.

가해자는 줄곧 사랑해서 이뤄진 관계로 강간이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피해자가 피해를 주장하고 있기는 하나 이 사건의 유일한 직접 증거가 피해자의 진술밖에 없고, 피해자가 성폭력 피해 이후 피해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해자를 계속 만났으며 가해자가 다른 사건으로 구속된 동안에도 피해자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해자의 집에 머무르며 지속적으로 가해자를 면회하고 서신을 보내 사랑을 표시했던 점을 들어 가해자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성폭력범죄를 저질렀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15세인 중학교 2학년 학생이 병원에서 부모 또래의 남성을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되어 만난 당일부터 성적인 행위를 자발적으로 하게 됐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처음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연예인을 시켜주겠다며 접근한 것으로 어린 나이였던 피해자가 그러한 악의적 접근에 얼마나 취약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위계와 위력의 관계에서 피해자의 동의에 의한 자발적인 성적 관계가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고 가해자에게 입은 성폭력 피해를 주변에 알리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가해자가 이 사실을 주변에 알린다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등 두려운 대상일수록 피해자는 피해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피해가 지속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특히 이 사건의 피해자는 부모님의 병환, 가족에 대한 염려 등으로 주변에 도움을 청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피해에 길들여진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양가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친족 성폭력 피해의 경우도 아동·청소년이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곧바로 가출하거나 주변에 알리지 못하다가 외부에 의해서 성폭력이 발견되어 도움의 손길이 닿았을 때에야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게 된다. 성폭력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사랑을 느낄 수도 있고 몸이 적응하고 반응하는 상황을 사랑이라고 믿어버리기도 쉽다. 그러한 사실 때문에 자신이 성폭력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 모든 상황을 피해자의 자발적 의지와 결정의 산물이라고 판단하고 지속적인 피해에 길들여진 피해자의 행위를 문제 삼아 애초 성폭력의 시작과 과정을 묵인하겠다는 대법원의 판단은 아동·청소년 대상 성폭력 가해자에게 피해자를 더 철저히 길들이고 피해를 지속시켜서 피해자가 피해임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하면 모든 책임을 면하여 주겠다는 주문에 다름 아니다. 더욱이 성폭력 피해 이후 피해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책임을 아동·청소년에게 요구하고 그렇지 못했을 때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겠다고 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아동·청소년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방기한 것이다. 이 판결로 향후 아동·청소년 성폭력에 대한 수사와 하급심 판결의 위축을 초래할 위험도 있다. 이에 반해 1·2심 법정은 피해자의 진술 이외에는 별다른 성폭력 피해 증거를 찾기 어려운 성폭력 사건의 특성을 명확히 이해하고 피해자의 진술, 상식, 성폭력 피해의 일반적 양상 등에 기초하여 세심하게 판단을 내리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판단 기관으로서 대법원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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