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능률교육 CEO에서 교육운동가로 변신
모두가 성장하는 교육 위해 파괴적 혁신 필요
스스로 배움을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해

 

본인 표현을 빌리자면 ‘귀신이 곡을 할 정도의 책상’이었다. 높은 칸막이 뒤의 책상은 온갖 책과 서류가 층층이 쌓여 있어 칸막이가 아니더라도 책상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대표실을 빙 둘러 놓인 책장엔 그 흔한 장식품 하나 없이 교육 관련 서적만이 빼곡했다. 특히 한쪽 벽은 외국 원서로만 채워져 있었다. 연 매출 약 500억원대의 ‘잘나가던’ 기업을 30여 년간 경영하던 CEO가 옮겨 앉은 자리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찬승(65·사진). 영어교재 출판 전문 회사인 능률교육의 창업자이자 경영자이던 그가 교육시민단체인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교바사)’의 대표가 된 지 벌써 만 5년이 넘었다.

공공선을 추구하는 교육

“객관식 시험으로 줄을 세워서 대학에 보낸다는 게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죠. 더욱 문제는 우리 사회가 그것을 공정하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공정하지 않은 것을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이야기죠.”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을 며칠 앞두고 만난 이 대표는 입시에 대해 따끔한 일침부터 던졌다. 대학에 입학하는 방법이 수백 가지라는 요즘, 부모의 정보력과 경제력은 ‘성공적인 입시’와 그 후 ‘성공적인 삶’의 필수조건이 돼 버렸고, 그런 부모를 갖지 못한 아이들은 사회 문턱을 밟아보기도 전에 배제되고 소외되는 현실. 더 이상 개천에서는 용이 나지 못하는 세상을 이찬승 대표는 ‘야만적’이라고 일갈했다.

“학원이 없는 산골이나 시골에서 자란 아이들, 부모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도시 빈곤층 아이들, 어떤 이유로든지 학습 부진이 누적된 아이들은 영원히 따라갈 수 없는 교육 시스템입니다. 특히 기초를 놓친 아이들에 대해 아무도 가슴 아파하지 않아요. 놓친 부분을 학교가 다시 보충해주는 시스템이 잘 돼 있어야 선진 교육인데, 한국에는 그런 시스템이 없죠. 학원에서 배워오라든지, ‘그건 네 책임이야’라며 무책임하게 그런 애들을 낙오자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수능은 ‘쟤들의 잔치’일 뿐이에요.”

이 대표는 해외의 이름난 교육 관련 학회나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세계의 교육 트렌드와 선진 교육 문화를 한국에 전파하는 일에 열심이다. 대표실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교육 관련 원서들도 직접 구입해 칼럼을 통해 한국 사회에 공유하고 있다. 능률교육 최고경영자(CEO)로 근무할 때도 이러한 관심은 계속됐었다.

“세계 교육의 큰 흐름은 ‘지속가능성’입니다. 학교의 지속가능성, 가정이나 사회의 지속가능성, 환경문제 같은 전 지구적인 지속가능성. 이게 1순위예요. 교육은 이런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잘난 몇 사람만 잘살고, 나머지는 미래의 희망을 가지지 못한다면 이들은 살기 위해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어요. 결국 핵심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빈곤층이나 사회문화적으로 낮은 계층을 교육을 통해 잠재력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발휘하면서 사회에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구성원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세계의 큰 흐름 속에서 한국 교육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해요. 그 역할을 ‘교바사’가 하고 있다고 봅니다.”

제빵, 미용, 네일아트, 타투, 프로 당구 등 자신이 관심 있고 배우고 싶은 분야를 3년 내내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교실, 어떤 과목을 어느 수준까지 배울 것인지 본인이 결정하고 책임지는 교실이 이 대표가 제안하는 학교의 모습이다. 이 대표 스스로도 이런 교육의 변화를 상당히 ‘파괴적 혁신’이라고 말했다.

“‘자기 주도 학습’이라는 말이 식상해지고 때가 묻었는데 진정한 자기 주도 학습은 스스로 미래에 대한 목표를 세우고 배울 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라면 고등학교는 적어도 이렇게 진행돼야지요. 이렇게 아이들이 존중받으면 기가 살 텐데 전부 교실에 가둬놓고 공부로만 줄을 세워서 너는 잘났고, 너는 못났고 판단하는 이런 제도는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해요. 이런 모습이 상식적인 것인데 우리가 너무 상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

 

CEO에서 교육운동가로

1980~9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권쯤 갖고 있었을 법한 영어 교재 ‘Vocabulary 22000’과 ‘능률 VOCA’는 이찬승 대표의 주요 히트작이다. ‘능률 VOCA’는 지금까지도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어 교재 회사의 CEO이자 유명 영어 교재의 저자이기도 한 그의 전공은 뜻밖에도 수학이다. 서울대 수학교육학과를 졸업한 이 대표는 무역회사에 취직해 넓은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었으나 2년 반 만에 그 꿈을 접고 영어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1980년 능률영어사(능률교육의 전신)를 창업한 그는 30년간 ‘다른 출판사들이 참고할 만한’ 책을 만들기 위해 절치부심했고, 발간하는 책마다 대부분 스테디셀러가 됐다.

“시대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었잖아요. 디지털 세대가 아닌 사람들은 디지털 교육 프로그램이나 교육 툴 같은 것에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빨리 나이 든 CEO는 물러나고 40대 젊은 CEO가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세계의 학회들을 다니다 보니 21세기에 접어들었지만 우리나라 교육은 준비가 미흡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나라도 배워서 한국에 전파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이런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승승장구하던 회사를 미련없이 매각하고 사재를 털어 비영리단체인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을 세운 게 2009년. 그동안 교바사는 현장을 바꾸는 프로그램 개발과 연구사업을 진행해왔다. ‘잉어빵’은 학교 밖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과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에게 제공하는 초등 영어 프로그램이다. 교바사 내 21세기교육연구소에서는 한국 교육평가 관련 연구와 토론회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사회성·감성교육연구소에서는 관련 프로그램 연구와 개발, 우수 원서 번역 출판, 심리치료 지원 등을 하고 있다. 특히 3년 전에 설립한 한국뇌기반교육연구소에서는 뇌 친화적 교수학습을 연구하고 교사들에게 연수를 통해 전파하고 있다. 뇌기반교육 교수과학 시리즈는 2012년부터 책으로도 출간되고 있다.

“헌법 제31조에 보면 모든 사람들은 자기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못하고 있죠. 한 교실 안에는 여러 수준의 아이들이 공존하고 개별화된 수업을 진행하지 못하니까요. 이런 것이 헌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기회를 잃어버렸거나 출발선이 불리했던 아이들도 공부 좀 하자, 내 잠재력이 뭔지를 발견해서 학교가 좀 키워줘라, 떳떳하게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사회인으로 살게 해 달라, 이런 주장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이 교바사의 핵심이고 생각입니다.”

 

교육은 모두가 성장하는 것

“누군가 ‘너는 앞으로 세계에서 최고가 될 것’이라고 어릴 때부터 계속 이야기 해준다면 본인이 믿지 않아도 유전자에 재배열이 일어납니다. 어떤 아이가 좀 느리다고 해서 배워야 할 목표를 쉽게 낮추는 게 아니라 정상적인 아이들만큼 배울 수 있다는 믿음을 부모와 교사, 사회가 모두 가져야 해요. 그런 아이들을 위한 예산을 더 많이 배정하고, 좀 더 발전된 교육제도와 도구를 공급해서 신나게 배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인재를 낭비하지 않고 나중에 사회복지나 범죄에 들이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가장 현명한 길이라는 것을 많은 연구들이 밝혀냈습니다.”

이 대표는 이러한 교육 목표를 ‘도덕적 교육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는 ‘될 놈 안 될 놈은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은 ‘무식한 이야기’라며 모두가 성장할 수 있는 교육을 제안했다. 지능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각자 잘할 수 있는 것을 끄집어 내주는 것이 ‘공정한’ 것이며, 그것이 ‘지속가능한 삶’과 ‘사회통합’을 이루는 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지금의 사회사업가로서의 모습은 ‘핏속에 있었던 것이 발현된 것’이라는 이 대표는 능률교육의 CEO로 있을 때부터 나눔에 대해 남다른 생각과 실천을 해왔었다. 그가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을 때 그 책을 산 아이들은 앞부분 몇 장만 보고 공부를 안 하는 경우가 많다는 영업부의 이야기를 듣고 그 아이들이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저는 일단 책값을 다 받았지만 공부를 안 하는 아이들은 별로 얻은 게 없잖아요. 그중에는 가난한 아이들도 많았을 거란 말이죠. 경영을 하면서도 이익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얘기를 쭉 해왔어요. 지금 하는 일들은 해왔던 얘기를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 양극화가 심해지고 소득 불평등이 심해질수록 유리하게 태어난 사람들이 나누어야 합니다. 부모에게 대물림 받은 거부들, 일부는 인정하지만 그 재산 다 자신이 가질 권리 없어요. 사회에 내놔야 합니다. 앞으로 이 운동을 확산할 생각입니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가장 유리하게 태어난 사람”이라는 이 대표는 자신이 “그렇다”며 교바사를 통한 활동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정한 사회, 공정한 교육이 이뤄져서 더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역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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