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에 곡을 붙인 전남 나주 남평 출신의 월북 음악가 故안성현 선생(1920-2006)을 기리는 노래비.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에 곡을 붙인 전남 나주 남평 출신의 월북 음악가 故안성현 선생(1920-2006)을 기리는 노래비. ⓒ뉴시스·여성신문

남자들에게는 ‘엄마’와 ‘여자’라는 익숙한 이분법이 있다. ‘엄마는 여자가 아니다’라는 말에 수많은 남자들은 머리를 끄덕일 것이다. 그러니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고 하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여자인 엄마가 여자가 아니라면, 과연 그 ‘여자’란 무슨 의미일까. 그건, 남자인 자신과 성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엄마는 바로 그 지점에서 제외되므로, 여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줌마는 제3의 성’이란 우스갯소리도, 성적 매력이 없어서 성적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대상이라는 의미이니, 이 이분법이란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가. 

이런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엄마는 여자가 아닐 뿐 아니라, 심지어 인간도 아니다. 다음 노래를 보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문희연 ‘엄마야 누나야’(김소월 작시, 김광수 작곡, 1967)     

이 노래 속의 ‘강변’을, 아파트 값 비싼 한강변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리적인 의미의 강가, 그 이상의 의미라는 말이다. 이 작품 속 강변에는 인간이 없다. 어부·뱃사공·물장구 치는 아이들은 없고, 그저 모래와 갈잎뿐이다. 갈잎이 서걱거린다니 계절도 늦가을인 모양이다. 아주 고적하고 쓸쓸한 강변이다. 그런데 화자는 이곳으로 가고 싶어 한다. 짐작건대, 화자는 세상살이에 아주 많이 지쳐 있다. 그래서 사람 냄새가 없는 곳, 오로지 강과 모래와 갈잎 같은 자연물만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 엄마를 데려가고 싶어 할까. 그건 엄마가, 인간세상 그 이전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엄마는 자신의 생물학적인 존재를 만들고 키워낸 존재이지, 흔히 ‘사회’라 부르는 인간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을 엄마로부터 떼어 인간세상으로 내보내는 존재를, 심리학에서는 ‘아버지’라고 한다. 질문을 하나 더 던져보면, 이 의미는 분명해진다. 이 작품의 화자는 왜 ‘강변’에 ‘아버지’와 함께 가자고 하지 않을까. 엄마와 달리 아버지란, 인간 세상을 떠나 강변에서 금모래나 보고 있으려는 아들을 야단 칠 것이 분명하다. 세상에 나가 무언가를 성취해야지, 도망치는 못난이가 되면 안 된다고 말이다. 

그러니 엄마는, 자신이 인간세상으로 나가기 이전까지 머물렀던 곳, 그곳을 관장하는 존재이지,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니 그런 존재가 심지어 ‘여자’일리도 없다. 이 작품 속 화자는, 애인이나 아내와의 관계조차도 힘들어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고 보인다. 

이런 내용은 노래 속에 꽤 많다. 민요를 변용한 타박네야의 화자는 존재의 고향인 엄마가 죽은 후의 상실감을 엄마 무덤까지 기어가서 그곳에 달린 개똥참외를 먹는 것으로 달래려 한다. 전선야곡을 비롯한 군인을 다룬 노래들이 일제히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도, 인간으로서 가장 견디기 힘든 세상에 부대끼며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고향 노래에는 늘 어머니가 빠지지 않고, 그 어머니는 세상이나 문명, 사회와는 절연된 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이런 노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사람들은 힘들 때에 이런 작품을 통해 위로받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어머니를 이런 이미지로만 매어놓고, 그것이 실제의 어머니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참으로 단순한 사고이며 퇴행적 태도다. 여자들이야말로, 바로 이러한 사고로부터 먼저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다. 엄마가 될 수 있는 여자는 ‘인간 아닌 엄마’라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 사고인가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그럽게 웃으시는 당신에게서/ 따뜻한 사랑을 배웠죠/ 철이 없는 나를 항상 지켜주시는/ 하늘처럼 커 보인 당신/ 우연히 서랍 속에 숨겨둔/ 당신의 일기를 봤어요/ 나이가 먹을수록 사는 게/ 자꾸 힘에 겨워진다고/ (중략) / 알아요 내 앞에선 뭐든지/ 할 수 있는 강한 분인 걸/ 느껴요 하지만 당신도/ 마음 약한 여자라는 걸

                              왁스 ‘엄마의 일기’(김진아 작사, 최준영 작곡, 2000)

엄마도 인간이란 걸 인정하는 이런 노래는 여자가 짓고 여자가 부른다. 그런데 이런 노래도 다시 함정에 빠진다. 엄마가 ‘인간’이 아니라 ‘여자’이지 않은가. ‘어머니와 여자’의 이분법, 강한 어머니와 약한 여자의 이분법에 다시 빠져버린 것이다. 남성 중심적인 상투화된 여성관은, 여자들에게도 너무도 강고하게 내면화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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