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최초 당대표, 중의원 의장 중등 정치역사 새로 써
평화헌법 수호, 여권 신장, 여성 정치인 발굴에 앞장서

 

2007년 광주세계여성평화포럼에 참석했을 당시의 도이 다카코. 
출처 : 여성신문 DB
2007년 광주세계여성평화포럼에 참석했을 당시의 도이 다카코. 출처 : 여성신문 DB

“산이 움직였다.”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의 아성이 무너졌다. 기적을 일으킨 주인공은 당시 사회당(현재의 사민당)을 이끌었던 도이 다카코. 일본 최초의 여성 당대표로서 처음 치른 선거였다. 선거 후 외친 그의 이 한마디는 일본 여성 정치인의 파워를 상징하는 어록이 됐다.

그렇게 일본 정치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도이 다카코 전 사민당 총재가 지난 9월 20일 일본 효고현 한 병원에서 사망한 사실이 28일 뒤늦게 알려졌다. 사인은 폐렴으로 향년 85세.

도이 다카코는 남성 중심적인 일본 정치계에서 ‘여성 최초’의 역사를 개척한 인물이다. 1969년 중의원으로 정계에 입문, 12회 연속 중의원에 당선되며 2005년까지 36년 동안 의석을 지켰으며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일본 헌정사상 최초 여성 당대표로서 사회당을 이끌었다.

1989년 사회당을 이끌며 처음 치른 참의원 선거에서 그는 소비세 증세를 추진하던 자민당에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외치며 강력하게 맞서 자민당의 과반 의석을 무너뜨렸다. 1993년 자민당 외 7개 당과 힘을 합쳐 ‘비자민 연립정권’을 세워 호소카와 모리히코 내각을 출범시킨 후 여성 최초의 중의원 의장에 취임했다.

그는 “평화헌법과 결혼했다”고 말할 정도로 ‘평화헌법의 수호자’로 활약하며 일본 보수세력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1994년 자민당과 연립정권을 통해 총리가 된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자위대는 합헌”이라고 주장하면서 당은 분열하기 시작했다. 1996년 당명을 사민당으로 바꾸고 다시 한 번 당을 맡아 재기에 나섰으나 계속해서 선거에서 패배했고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 2008년 10월 정계에서 은퇴했다. 한때 일본 정치계의 가장 강력한 야당이었던 사민당은 이제 의석 5석의 군소 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28년 고베에서 의사의 딸로 태어난 그는 교토여자전문학교(현 교토대) 중국어과에 입학했으나 3학년 때 평화주의와 헌법 제9조에 대한 강연을 들은 것을 계기로 도시샤 대학 법학부에 편입했다. 그곳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친 후 헌법을 강의하던 그는 자민당의 헌법 개정에 맞서 투쟁을 벌이다 1968년 사회당으로부터 입후보 제의를 받고 정계에 뛰어들었다.

1980년대 후반 사회당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도이 다카코는 ‘남성들만의 리그’였던 일본 정치계에서 여성의 입지를 높이는 데 앞장섰다. 1985년 일본의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 비준을 이끌어낸 주역도 그였다.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는 그가 이끄는 사회당 소속 여성 후보 11명을 당선시키며 이른바 ‘마돈나 선풍’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2003년 도이 다카코의 뒤를 이어 사민당 총재를 맡았던 후쿠시마 미즈호 또한 도이가 발굴한 여성 정치인 중 한 명이다. 그는 28일 트위터를 통해 “도이씨의 제안으로 1993년 헌법을 지키기 위해 참의원 입후보를 결심했다”면서 “그의 죽음은 정말 충격적인 일이며 ‘정치계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 같다”고 애도를 표했다.

그는 또한 대표적인 ‘친한파’ 의원으로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1973년 도쿄에서 납치된 김대중 전 대통령 구명운동과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전개했으며 2007년 광주세계여성평화포럼에도 참여하며 한국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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