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연구한 법보다 꽃·음악 사랑하는 ‘낭만가’
“법과 정책이 삶까지 보듬을 수 있어야”

 

“법이 정의 실현은 하지만 삶의 어려움을 전부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지난 8월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원장으로 3년의 임기를 마치고 교단으로 돌아온 최금숙(64·사진)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화여대 법대의 넓고 햇볕이 잘 드는 교수실을 마다하고 조그만 방을 새 보금자리로 삼은 그는 1969년 이화여대 법학과에 입학한 이후 30년 넘게 법을 연구한 법학자다. 법대 교수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귀가 쫑긋했다. 

최 교수의 경력을 들여다보면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대학 졸업 직후 결혼을 한 그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경력단절을 겪어야 했다. 일을 하기 위해 취직도 하는 등 여러 차례 시도해봤지만 아이를 키우는 주부에게 돌아오는 좋은 일자리는 없었다. 75년부터는 2년간 한국가정법률상담소와 부산가정법률상담소에서 상담을 했다. “전공을 살려 사회에 보탬이 되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을 할수록 공부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고 했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 도우며 여성 권익에 관심

“상담을 할수록 내가 이 여성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당시 남편에게 매를 맞고 상담을 하러 오는 여성들은 경제력이 전혀 없었어요. 대부분 매를 맞다가 죽는 일은 면하기 위해 아이를 업고 집을 뛰쳐나왔지만 갈 곳이 없는 여성들이었어요. 그런 그들에게 ‘민법 제840조 제3호에 따라 이혼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제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제가 공부를 통해 실력을 키워 반듯하게 서는 것이었어요. 제 뒤에 많은 여성들이 있다고 생각했죠.” 

 

최 교수는 대학 졸업 후 8년 만에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두 자녀를 유치원에 보내놓고 본격적으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83년부터 강사로 대학 강단에 선 그는 이후 가족법 전문가로서 여성·가족 정책에 관심을 갖게 됐고, 자연스레 여성정책연구원장으로도 일할 수 있었다. 

그가 여성정책연구원장으로 일한 지난 3년 동안 연구원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임기 중간에 정권이 바뀌면서 일·가족 양립 정책과 여성 일자리 정책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다. 정부 용역 연구도 기존에는 대부분 여성가족부에서 받았지만, 기획재정부·안전행정부·고용노동부 등으로 다양해졌다. 연구원의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세계화)’도 확산돼 인도네시아·캄보디아·미얀마·베트남과 국제교류를 하며 아시아에 한국의 여성정책을 알리고 있다. 연구원을 비롯해 전국 16개 여성정책연구원이 함께 성주류화 확산에 앞장서면서 여성친화도시 등 지역의 여성정책 안착에도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최 교수가 가장 기억에 남는 성과로 꼽은 것은 의외로 시범사업으로 진행한 ‘꽃과 나무 할머니의 손자 인성교육’이었다. 꽃과 나무 할머니의 손자 인성교육은 여성친화도시를 중심으로 교육을 받은 할머니들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가서 꽃목걸이, 꽃반지, 꽃지도, 꽃다발 만들기 등을 강의하고 약 3만원의 강의료를 받도록 하는 일자리 창출 방안이다. 

삶에서 중요한 건 속도 아닌 방향 

“인성교육의 중요성은 또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중요성이 잘 알려져 있어요. ‘꽃과 나무 할머니의 손자 인성교육’은 할머니가 손자에게 알려주듯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식물에 대해 함께 공부하고, 체험하는 인성교육이에요. 무엇보다 50~60대 중·장년 여성 중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손을 놓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나라 여성 노인 빈곤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습니다. 여성 빈곤을 해결하는 데 일자리 창출이 절실하죠. 이 프로그램은 작은 움직임이지만 더 큰 변화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꽃과 나무 할머니의 손자 인성교육’은 방송통신대학교에서 강사 양성 교육도 진행된다. 최 교수는 이 사업을 정부 지원·시민사회 기부·자원봉사가 합쳐진 민관 협력 모델로 확대되길 원했다. 프로그램이 사업으로 이어지는 데는 무엇보다 각 주체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최 교수가 직접 발 벗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동분서주 중이다. 하지만 공동체를 위해 선뜻 자원을 기부하겠다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 누구도 세상을 혼자서 살아갈 수는 없어요. 하지만 개인주의가 심화되면서 공동체도 무너지고 있어요. 많이 가진 분들이 사회를 위한 일에 참여하고 협력해야 공동체가 유지됩니다. 학생들에게 내가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얘기해요.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실제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누가 먼저 앞서 나가는지보다는 어떤 방향으로 가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최 교수는 자녀들에게도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한 적은 없지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는 성경 구절을 수없이 강조했단다. 그가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친 또 하나는 예술이다. 법대 교수인 어머니와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을 지낸 법조인 아버지(변동걸 법무법인 화우 고문변호사) 사이에서 자란 남매가 모두 음악가로 성장했다. 딸 변정희씨는 음악 공부를 위해 다니던 대기업 패션디자이너라는 번듯한 직장을 그만두고 서른셋의 나이에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현재는 재즈 아코디언 연주자로 활동 중이다. 아들 변준섭씨는 연극 음악감독이고, 며느리도 이주여성을 다룬 영화 ‘바다를 건너온 엄마’를 만든 영화감독 정연경씨다. 

 

법조인 부부 밑에서 예술가로 큰 남매

“아이들이 음악을 하고 싶다고 해서 지원해준 것이죠. 딸은 결혼할 나이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음악을 위해 유학을 떠났어요. 더 늦으면 못할 것 같다는 딸의 말에 도와주기로 한 거죠. 제가 교수잖아요. 학생의 재질을 보고 능력이 있다면 원하는 대로 키워주는 것이 교수의 역할이죠. 법이라는 것이 정의 실현을 하고 사회의 질서를 지켜주긴 하지만 예술처럼 삶을 풍요롭게 해주지는 못하잖아요. 예술은 하는 사람도 행복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삶의 가치를 주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매우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최 교수는 음악가의 어머니이자 법학자로서 문화예술인 지원 법률에도 관심이 많다. 실제 ‘한류’ 열풍으로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지만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인 대부분(66.5%)의 월수입이 100만원 이하다. 이 중 26.2%는 전혀 수입이 없고, 8.2%는 10만원 이하, 4.1%는 11만~20만원 이하, 15.1%는 21만~100만원 이하로 나타났다. 그는 “한류의 기초가 되는 언더그라운드 문화에도 정부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최 교수도 자녀들 못지않게 예술을 사랑하는 ‘낭만가’다. 정년퇴임 후에는 꽃가게를 하고 싶을 만큼 꽃을 좋아하고, 남북여성합창단 ‘여울림’의 단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음악을 사랑한다. 특히  합창단은 ‘여성인권을지원하는사람들’(대표 최영애)이 운영하는 곳으로, 탈북 여성들과 함께 벌써 4년째 매주 연습과 공연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합창단에서 ‘알토’ 파트를 담당하고 있다. 여울림은 태백합창제에서 3등을 차지할 만큼 합창 실력도 인정받았다. 통일을 준비하려면 북한을 알고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북한법에 대한 관심도 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법을 알면 북한 사회를 알 수 있어요. 당규의 힘이 강력하긴 하지만 북한이 세계무대에 나올수록 법의 영향력도 더욱 강력해질 수밖에 없어요. 통일을 준비하려면 남북한이 하나 된 법을 만들어야 하는데, 가장 처음 논의할 수 있는 것이 양성평등법이에요. 북한이 차별철폐조약에도 가입돼 있기 때문에 가능하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북한학 과정에서도 북한법을 따로 다루지 않아요. 대학도 공동체의 한 주체로서 통일을 위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에 대해 알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할 필요가 있어요.”

최 교수는 학교로 돌아온 후 학생들에게 “공부에만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법학전문대학원 학생들은 대부분 사회에 나가면 법조인의 길을 걷기 때문에 더욱 사회에 필요한 인재가 되길 바라는 선생님의 마음이 담긴 조언이다.

“법이 사회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한계가 있는 것처럼,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부족한 부분과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해야 하고, 남이 부족한 부분은 자신이 채워주면서 서로 손을 잡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삶이 채워지고, 즐거움도 얻을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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