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영 작가와 함께 걸어
예술가와 시민이 함께 하는 ‘거리 메이크업’ 진행

가을이 오면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다. 경복궁 서쪽과 인왕산 동쪽 사이에 있는 서촌이다. 조선시대엔 중인들이 모여 살았고, 근·현대엔 윤동주, 이중섭 등 문인들이 작품 활동을 했던 곳이다. 한옥마을로 유명한 북촌과 달리 서촌은 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옥이 남아 있다.  

몇 달 전부터 서촌 일부가 갤러리가 됐다. 금천교 시장부터 배화여대를 거쳐 사직파출소에 이르는 골목이다. 서울문화재단이 ‘2014 도시게릴라프로젝트’로 예술가와 시민이 골목을 탈바꿈하는 ‘거리 메이크업’을 진행 중이다. 22일 오후 이번 프로젝트를 총괄 기획한 환경미술가 이구영(46) 작가와 함께 서촌 골목을 걸었다.

 

출발은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 앞에 있는 금천교 시장이다. 시장통에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는 순간 이 작가가 벽을 가리킨다. 매화 그림이 한눈에 들어온다. 갈라진 벽이 나뭇가지로 변신했다. 감탄사를 연발하자 또 다른 작품을 소개한다. 검은 실루엣으로 처리된 꼬마가 오줌을 눈다. 벗겨진 벽면이 예술로 보이는 순간이다. 구석구석이 보물 찾기다. 

이번 프로젝트를 앞두고 연초부터 이 작가는 서촌 취재를 다녔다. 찍어온 사진을 보며 ‘어떻게 거리를 바꿀 수 있을까’ 연구를 했다. 그렇게 해서 200여 점의 작품이 탄생했다. 

“서촌 골목 전체가 갤러리가 됐죠? 보통 벽화는 기존의 것을 없애고 덧칠하는데, 저는 켜켜이 쌓여 있는 추억을 인정하고 싶어 그러지 않았어요. 벽에 있는 금이나 오물이 ‘개선해야 할 안 좋은 것들’이라는 인식이 싫었거든요.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착한 미술’ ‘틈새 미술’로 부르고 싶네요.”

 

유쾌한 씨.
'유쾌한 씨.'

이 작가가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유쾌한 씨.’ 금천교 시장 부근 건물 옥상에 설치된 포장텐트에 눈을 붙인 작품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텐트에 찢긴 천막이 흔들리면서 눈썹이 날리는 것 같다.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파이프를 타고 창문 위에 올라가기도 했다. 

 

작품 ‘거인의 잠.’ ⓒ여성신문
작품 ‘거인의 잠.’ ⓒ여성신문

종로구 누하동 서울환경연합 부근 골목에는 거인이 잠들어 있다. 담쟁이덩굴을 흩날리는 머리카락으로 생각한 이 작가는 돌담 아래 눈과 코를 그렸다. 작품 이름은 ‘거인의 잠.’ 위치에 따라 보이는 느낌이 다르다.

 

‘인왕산 등반도’ 그림에 앉아 이구영 작가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여성신문
‘인왕산 등반도’ 그림에 앉아 이구영 작가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여성신문
 

배화여대로 가는 골목길을 오르면 멋진 작품이 기다린다. 흘린 땀이 아깝지 않다. 매동초등학교 앞의 ‘인왕산 등반도’다. 가로 5m, 세로 1.5m에 달하는 이 작품은 그야말로 골목에서 탄생한 ‘대작’이다. 벽돌 위에 덧칠해 생긴 시멘트벽 밑부분을 인왕산으로 삼았다. 10여 명의 사람들이 등산 가방을 메고 힘겹게 산을 오르고 있다. 우리네 인생 같다. 갈라진 틈에는 폭포수가 시원하게 흐른다. 

작품 위에 앉은 이 작가는 “좋은 작품의 밑바탕이 있어서 화룡점정을 찍은 것 같다”며 “감각이 없어도 가능한 일이다. 하나하나 그리다 보면 또 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관찰력’과 ‘애착’이 중요하다”며 함께 참여해볼 것을 권했다. 오후 한낮 다양한 작품이 유물처럼 펼쳐진 서촌의 매력에 잠시나마 푹빠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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