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대중화와 학술한류, 전통한류 위해 애써
“고전문헌에 생명을 불어넣어 살려내는 게 시급”

 

전 이화여대 총장과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전 이화여대 총장과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게 왕비의 가마예요. 왕비의 가마 옆에 말을 타고 가는 사람들 중에 얼굴을 가린 이들이 여성들이고 그중에 얼굴을 가리지 않은 한 명이 의녀예요. 혹시 가마를 탄 왕비가 멀미를 하거나 몸이 불편하면 바로 돌봐야 하기 때문에 얼굴을 가리지 않고 가마를 예의 주시했던 거죠.”

역사책에서 얼핏 스쳐 지나가며 봤던 그림 속 사람들 모습이 설명을 듣고서야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이배용(67)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은 조선의 19대 임금인 숙종과 인현왕후의 혼례식 행사도인 ‘숙종인현왕후가례도감도청의궤’의 일부분이 그려진 부채를 펼쳐 보이며 그림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상세히 설명했다. 자칫 어렵고 고루하게 느껴지는 역사와 고전을 스토리텔링으로 엮어 편안하고 쉽게 접근하게 하는 것, 취임 1년을 맞은 이 원장이 한국학 대중화를 위해 애쓰고 있는 부분이다.

“한국학이 전문성은 있지만 대중화가 덜 되어 있어요. 그래서 국민에게 다가가고 우리의 영혼을 찾고 자긍심을 일깨우는 학문적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또 그런 부분들이 세계와 소통해야 합니다. 현재 대중 한류만 주목하고 있지만 고품격의 지속적인 학술 한류, 전통 한류를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1978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출발한 한국학중앙연구원은 한국 문화에 관한 인문·사회과학적 연구, 국내외 한국학 분야 연구자 양성, 한국 고전자료의 수집·연구·번역·출판뿐만 아니라 교육, 대중화, 정보화, 세계화 등의 분야에서 한국학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한국학의 허브라 할 수 있는 이곳에 이배용 원장이 지난해 9월 최초의 여성 원장으로 취임했다. 취임 후 이 원장은 기록문화유산을 국민과 소통할 수 있도록 ‘고전자료의 현대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곳 장서각에 조선왕조 왕실문헌이 12만 권 있습니다. 지방 문중들에서 기증, 기탁한 고문헌도 5만 권에 이릅니다. 이러한 고전 자료의 현대화 작업이 번역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번역을 통해 소재와 스토리를 발굴하고 유익한 울림을 줘야 해요. 기증받은 고전 자료들 중에는 훼손된 게 많아 복구하는 작업도 함께 해야 합니다. 제가 고전 자료 병원이라고 합니다. 이 엄청난 자료들이 사장되면 안 되는데 예산이 부족해요. 문헌에 생명을 불어넣어 살려내는 게 매우 급하고 절실합니다.”

또 연구 성과들을 국민과 공유하기 위해 ‘찾아가는 한국학 아카데미’ ‘한국학 오픈 아카데미’ ‘찾아가는 한국학 콘서트’ 등 대중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학이 인문학의 본산입니다. 우리는 먼 곳에서만 찾는데 얼마나 사람답게 길을 열어가느냐 하는 인문학의 답이 한국학 안에 있습니다. 전통을 알면 자긍심과 숭고함, 겸손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럼 지금 우리가 분열할 이유가 없어요. 화합을 위한 해답은 전통에 있습니다. 사인도 서양의 것이 아닌 우리의 문화예요. 공신록이나 분재기를 보면 사대부들이 한자로 사인을 멋있게 했어요.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었던 우리 것들이죠.”

 

전 이화여대 총장과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전 이화여대 총장과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운영하고 있는 한국학대학원에는 석·박사 과정 260여 명의 학생 중 전 세계 35개국에서 온 외국 학생 수가 130명으로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한류의 영향으로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 지역, 유럽, 아프리카, 남미에서까지 한국학을 공부하기 위해 모여들고 있다. 이 원장은 “이들이 한국학을 전 세계에 전파할 사람들”이라며 한국학 인재 양성을 통해 대중문화 중심의 한류를 넘어 학술 한류 형성을 소망했다.

역사학자로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것 같다”고 취임 1년의 소회를 밝힌 이 원장은 경쟁논리에 밀려 인문학이 소외되는 사회 분위기에 대해 “사람이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행복이 빵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며 “인문학은 그 부분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문학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조상들이 알려준 ‘역지사지’라고 생각합니다. 나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서 기쁠 때 축하해주고, 슬플 때 위로해 줄 수 있는 함께 가는 길이 인문학의 중심입니다. 어떤 문제의 해법을 찾으려면 이해관계와 현실에 얽혀서 길이 안 보일 때가 있어요. 전통과 역사에 답이 있습니다. 역사가 결국 인문학의 역사거든요. 역사에서 주는 메시지를 압축하면 인간이 욕망을 절제하고 그러면서 나누고 배려하는 마음, 지나치고 무리하면 화를 자초하는 그 역사를 보면 더 절제하고 겸허해질 수 있죠.”

지난해 12월 ‘여성발전기본법 일부개정 법률안’이 통과되면서 추진되고 있는 여성사박물관 건립 또한 이 원장이 기초를 닦았다.

“우리나라는 사립 박물관까지 박물관 1000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인류의 절반이 여성인데 너무 부분적으로 제한적인 것만 알고 있는 거예요. 여성들의 자긍심과 울림이 되는 전시관이 있어야겠다 생각하고 자료를 모으는데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무궁무진해요. 선덕여왕의 통일 기여, 소서노의 백제 건국, 신사임당 초충도의 생명존중의 사랑, 김만덕의 나눔 이야기, 유관순 열사의 투혼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한데 그동안 너무 정치사 중심으로 역사를 보다보니 놓친 것이죠.”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생활 속에서 쉽게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도록 독려하는 이 원장은 ‘주전자 정신’을 강조했다. 역사와 문화에서 키워드를 뽑아내고 스토리텔링하는 그의 능력이다.

“주인정신과 실력을 갖춘 전문성, 자기가 맡은 일에 자긍심을 가져야 해요. 그래서 주전자 정신이에요. 자긍심이 있어야 경쟁에서 극대화됩니다. 또 주전자에 담긴 물로는 목마른 이웃에게 나눠줄 수 있는 나눔, 지금 시대뿐만 아니라 다음 시대까지 부어줄 수 있는 섬김이 중요합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