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일병 사망 사건’에 분노하는 엄마들...‘국가’ 믿지 못해 직접 나선다
모병제 도입, 휴대폰 지급 등 구체적 병영개혁안 내놓기도

 

“내 아들은 ‘국가’가 아닌 ‘엄마’인 내가 지킨다”며 군 내부의 변화를 외치는 엄마들의 목소리가 뜨겁다. 지난 4월 선임병들에게 폭행당해 사망한 윤 일병 사망사건으로 온 국민이 충격에 빠진 가운데 11일 오후 윤 일병과 같은 28사단 소속 관심병사 2명이 동반 자살하면서 엄마들의 슬픔과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무력하게 슬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지키기 위해 직접 움직이기 시작한 엄마들이 군대의 변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실제로 주부들이 주축인 온라인 커뮤니티 ‘레몬테라스’와 ‘맘스홀릭’ 등에서는 윤 일병의 기사를 접한 엄마들의 분노의 글이 빗발치고 있다. 지난 7월 31일 군인권센터가 공개한 28사단 집단 구타 사망사건 일지를 통해 단순 폭행으로 알려졌던 윤 일병의 죽음이 선임병들의 가혹행위에 따른 것으로 드러나면서 엄마들의 공분을 산 것.

다음 아고라에도 윤 일병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해 숨지게 한 이모(26) 병장 등 선임병 4명에게 극형을 구형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해달라는 비슷한 글이 수백 건 쏟아졌다. ‘28사단 윤 일병 사망사건 살인죄 적용 강력하게 요구합니다’라는 제목의 온라인 서명 청원글에는 8000여 명이 동참했다.

하루 한 두 개 정도의 글이 올라오던 국방부 홈페이지 국민제안 게시판도 마찬가지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글을 올린 30대 주부는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가해자와 지휘관 모두 살인죄를 적용해야 한다. 윤 병장의 부모가 4개월 넘게 어떻게 살았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저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5일 경기 양주 28사단 보통군사법원 소법정에서 열린 윤 일병 사망사건의 4차 공판에는 50여명의 엄마들이 재판을 참관하기 위해 모였다. 대다수 자녀를 군대를 보냈거나 곧 군대를 보내야 할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이들은 윤 일병을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가해자에게 분노에 찬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지난 8일 용산 국방부 앞에서 열린 윤일병 등 군대 피해자들을 위한 추모제에도 군대 내 가혹행위로 숨진 장병들의 가족들과 함께 많은 여성들이 참석해 눈물을 흘렸다. 

고등학생 아들을 키우는 주부 김소은(가명·45)씨는 “미국에 이민 간 친척이 부러울 정도”라며 “이대로라면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싶지 않다”고 불안해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자신을 50대 주부라고 밝힌 여성은 “군에 간 아들이 선임에게 갈굼을 당해 남편이 중대장에게 바로 연락해 내무반을 바꿨다”면서 “군에 간 아들이 혹시 폭력 등의 피해를 당할 경우 참지 말고 직속 상관이 아닌 부대 최고 책임자에게 즉각 직보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숨진 윤 일병과 비슷한 또래의 자녀를 둔 엄마들부터 다섯 살 난 아들을 둔 엄마까지 ‘내 아이’를 넘어 ‘우리 아들들’을 위해 군 인권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이번 사건을 가해자 개인만의 잘못이 아닌 국가 전체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자녀를 군에 보낸 이희옥(가명·46)씨는 “정치 공세를 하는 건지 사고를 안타까워 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고 말했고, 대학생 자녀가 있는 김진주(52)씨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사병 인권을 챙겨야한다”고 지적했다. 한 여성은 “군에 보낸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해서 ‘여기 천국 같다’라고 말하라고 했다. 일종의 암호를 정했다”고 말했다.

군 사망사고 피해 유족들의 모임인 ‘의무복무 중 사망 군인의 명예회복을 위한 전국 유가족협의회’도 지난 6일 오전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더 이상 군에서 윤 일병과 같은 참혹한 죽음이 벌어지지 않도록 군 폭력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사건에 대한 단순한 분노를 넘어 ‘왕따(집단 따돌림)’ 등 병영 부조리와 군대 문화를 개혁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의견도 많다. 엄마들이 온라인을 통해 내놓은 개선책은 △징병제 폐지, 모병제 실시 △특별법 제정 △휴대폰 지급 △내무반 등 사각지대에 폐쇄회로 TV(CCTV) 설치 등 다양했다.

그러나 엄마들은 △민관군 병영문화혁신위원회 운영 △병사 고충 신고 및 처리 시스템 개선 등 군이 대놓은 대응책은 믿지 못하는 분위기다. 권오성 육군참모총장이 5일 사임하겠다는 뜻을 밝힌 뒤에도 이러한 분위기는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군은 사안의 엄중함을 고려해 윤 일병 집단 구타 사망사건 가해자에게 살인죄를 적용하는 방안도 검토할 방침이라고 8일 밝혔다.

전문가들은 군 폭력 문제를 막기 위해서는 관련 군 자체적으로 문화와 제도를 바꾸는 인식 전환이 수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후적 임시처방은 안 된다는 것이다. 여군 중사 출신인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손인춘 새누리당 의원은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외부에서 교육 전문가를 데리고 오는 것보다 그 이전에 군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면서 “지휘관이 병사 관리 책임을 다해야 한다. 사단장과 연대장이 병사들과 밥을 한 끼만 같이 먹고, 관심을 가진다면 군 관련 사건은 반 이상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정치 군인만 있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피우진 예비역 중령은 “군은 장병들을 더 이상 도구화해서는 안 된다. 군 관계자들의 사고부터 바뀌어야 한다”며 “1915년 독일이 도입한 옴부즈맨 성격의 민간 국방감독관 제도 등을 도입하는 것을 추진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어 “남북 대치 상황에서 국가를 믿고 군에 들어온 장병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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