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지위 향상에 기여해 ‘국민훈장 동백장’
여성의 강점 살리고 강인함 갖춰야 성공
도전정신 가진 여성 인재 많아져야

 

세상은 흔히 성공한 여성 리더들을 여장부 또는 여걸이라고 부른다. ‘남자처럼 굳세고 기개가 있는 여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여장부라는 단어 속에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남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남성처럼 행동해야 하는 여성들의 고단한 삶도 녹아 있다. 그러나 한국여성경제인협회를 이끄는 이민재(70·사진) 회장은 “이제 여성성으로 승부해야 하는 시대”라고 단언한다. 여성 경영인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시절, 오로지 끈기로 꿋꿋이 버텨내 자수성가한 그가 자신을 성공으로 이끈 비결로 ‘여성성’을 꼽았다. 카리스마 넘치는 그에게서 여성성이라는 말을 들으니 조금 의아스러웠다. 하지만 인터뷰를 하면서 때론 부드럽게, 때론 단호하게 자신의 인생 역정과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쏟아내는 그의 얘기를 관통하는 큰 줄기가 바로 여성성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점심은 했어요? 밥은 꼭 챙겨 먹어야 해요.”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집무실에서 만난 그는 서둘러 인터뷰를 시작하려는 기자에게 “차부터 들고 천천히 하자”면서 식사 걱정부터 했다. 시간이 돈보다 귀중한 경영자에게 듣는 ‘천천히’라는 말이 꽤 반가웠다. 

여성 기업인 우대 정책 시행에 기여

이 회장은 지난해 1월 한국여성경제인협회 7대 회장에 취임했다. 1977년 출범한 여성경제인협회는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이 협회장을 맡았던 1999년 여성기업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 법정단체가 됐다. 현재 여성기업 약 1800곳을 회원사로 두고 있다. 이 회장은 여성 대통령 시대에 여성 경제인들의 대표를 맡으면서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그만큼 부담감도 컸다고 했다. 

“여성기업 지원에 대한 법률이 제정돼 있지만, 현장에선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고충을 해소해달라고 수차례 정부에 건의했지만 해결되지 않았죠. 그런 상황에서 회장직을 맡고 보니 해야 할 일이 산적하더군요. 다행히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면서 정부도 여성 기업인들이 느끼는 ‘손톱 및 가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 나서면서 고질적인 문제가 조금씩 풀리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고, 여성의 경제참여 확대가 국가적 과제가 되면서 자연스레 여성경제인협회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협회 회원들의 숙원 과제였던 공공기관의 여성기업 제품 구매가 지난 1월부터 권고제에서 의무제로 강화되면서 여성 기업인들의 숨통이 조금 트였다. ‘공공기관이 물품 및 용역을 구매할 때 총액의 5% 이상, 공사 발주 때에는 3% 이상에 해당하는 일감을 반드시 여성기업에 할당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경영평가를 받는 대부분 공공기관들은 이미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여성 중소기업인이 만든 제품에 대한 소액 수의계약 기준도 기존 2000만원 미만에서 5000만원 미만으로 상향 조정됐다.

대통령 해외 순방에 매번 참가

여성기업에 대한 정부의 관심은 이 회장의 지난 1년6개월간의 일정만 봐도 확인할 수 있다. 

이 회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모두 참가한 유일한 여성 기업인이다. 지난해 5월 미국을 시작으로, 중국(6월), 베트남(9월), 인도네시아(10월), 프랑스·영국·벨기에(11월), 인도·스위스(올 1월), 독일(3월),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스탄(6월)까지 모두 여덟 번의 대통령 해외 순방길에 참여했다. 

“예전에는 대통령 해외 순방에 참여하는 여성 기업인들이 거의 없었지요. 하지만 이번 정부에서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 기업인들이 경제사절단에 참여할 수 있었어요. 여성 기업인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해외 순방을 통해 우리 협회를 현지에 알리고, 현지 단체들과 네트워크를 맺는 기회를 얻는 실질적 효과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회장은 해외 순방을 통해 얻은 네트워크를 활용해 협회사들의 해외 진출을 돕고 있다. 지난 7월 23일 수출 중소기업과 수출을 원하는 초보기업들 간 수출 정보와 경험, 노하우를 공유하는 ‘여성기업 엑스포트 클럽(export club)’ 1기가 출범했다. 협회는 수출 유망 국가 현지 시장조사, 해외 바이어와 해외 단체와의 수출상담회 개최, 전문 컨설턴트와 현지 전문가 초빙 세미나 등을 통해 해외 진출을 적극 지원할 방침이다.  

이 회장은 지난 7월 24일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해 힘써온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다. 창업을 하는 여성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여성들에게 멘토 역할을 하며 경력단절 여성 우대 채용, 여성 일자리 창출과 일·가정 양립 정책을 적극 지원하고 있는 노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 회장은 이번 수상에 대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아직 할 일이 많은데 부끄럽다”고 손을 내저었다. 

“그저 열심히 회사를 경영하는 일만 하고, 협회장직은 그저 봉사하는 일로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제가 제도를 바꾸고, 국가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래서 상을 주신다고 했을 때 내게 걸맞은 상인가 하는 생각도 들어 부끄러웠지요. 다만 앞으로 여성 기업인들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라는 상이라는 생각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어요.”

 

18년 경력단절 딛고 44세에 무역회사 창업

이 회장은 그의 말대로 정말 열심히 살았다.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직장생활을 한 그는 25세에 결혼을 하고 18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았다. 두 아들을 키우던 어느 날 남편이 갑작스럽게 실직을 하게 되자 생계비 마련을 위해 사업에 뛰어들었다. 마흔네 살이 되던 해였다. 18년의 경력단절을 딛고 그가 설립한 특수용지와 사료를 수출하는 광림무역상사㈜(2004년 엠슨㈜으로 사명 변경)는 현재 매출 300억원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둘째가 고등학교 3학년, 첫째가 대학교 1학년 때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이 명예퇴직을 했어요. 애들 공부라도 시켜야겠다는 생각에 그땐 필사적이었지요. 하지만 정말 쉽지 않았어요. 술 접대나, 같이 사우나를 하면서 업체들과 친분을 쌓는 남성들과 경쟁해야 했기 때문에 힘들었어요. 여자라는 이유로 만나주지도 않는 업체 사장들과 구매 담당자들을 끈질기게 기다리고, 끊임없이 연락을 했죠. 어렵게 만나주더라도 그들이 절 보는 눈빛은 탐탁지 않았어요. ‘집에서 살림이나 하지. 몇 푼이나 번다고 돌아다니냐’는 말을 들었을 땐 자존감이 땅에 떨어지고, 굉장한 비애를 느꼈죠. 그래도 꾹 참고 명함을 내밀면서 웃으며 말했죠. ‘제 말씀 좀 들어주시죠’라고요.”

끈기와 소통이 그의 영업 전략이었다. 금융사와 업체의 구매 담당자들이 여성 기업인을 ‘여성’으로만 바라보는 관행을 끈질긴 노력으로 깨부순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여성에 대한 편견과 지원 부족으로 인해 여전히 많은 기업인들이 자금 확보와 판로 확대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최근엔 지원 제도는 있지만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있으나마나’ 한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자금·판로 등 ‘손톱 및 가시’ 여전

“가족을 부양하는 여성 가장의 생계와 자립을 위한 창업자금 예산을 올해 50억원가량 확보했지만, 수혜를 받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생계를 위해 작은 가게를 운영할 수 있는 자금을 지원하는 제도인데, 신용등급이 낮으면 자금 지원조차 받을 수 없게 돼 있어요. 생계형 창업 자금에는 신용등급에 상관없이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여성 창업자에 대한 신용대출 확대도 협회의 과제다. 현재 규모가 작은 사업을 하는 여성은 신용대출을 받기가 어렵다. 이 회장은 “여성 기업인들은 정직하고, 무리하게 사업 확장을 하지 않아 안정적인 경영활동을 하는 만큼 여성기업에 대해 좀 더 완화된 기준을 적용해주도록 신용보증기금 등 관계 기관에 요청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편견 속에서도 자수성가한 경영인으로서 그가 생각하는 여성 기업인이 가진 장점과 단점에 대해 물었다. 

“여성은 소비자와 상대 회사에 부드럽게 다가갈 수 있고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뛰어납니다. 가정을 관리해 온 여성의 특성상 작은 문제도 섬세하게 챙기는 점도 강점이지요. 여성성으로 승부하면 사업에도 성공할 수 있지요. 하지만 임신과 출산, 육아로 인해 일을 포기하는 여성들이 많은 것은 안타깝습니다. 정부 지원도 필요하지만 여성 스스로도 힘들어 포기하고 싶더라도 멀리 내다보며 이겨냈으면 합니다. 끈질기게 버텨내면 결국 원하는 것을 이뤄낼 수 있어요.” 

여성에게도 공평한 기회 주는 게 중요

그는 여성기업 우대 정책에 대한 일부 볼멘 소리에 대해 “여성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는 지원제도”라고 설명했다.

“열악한 상황인 여성기업을 남성과 같은 선상에 놓고 경쟁하도록 하는 것은 공정한 사회가 아닙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역사가 100년이 넘고, 중소기업중앙회도 50년이 넘었지만 여경협은 이제 15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편견 속에서 여성들이 사업을 하는 것은 남성에 비해 어려운 것이 현실이에요. 한시적으로라도 여성 기업인들이 남성들과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정부와 사회의 배려와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 회장은 성공한 경영인이지만, 다섯 명의 손주를 가진 할머니이기도 하다. 타고난 건강 체질이지만 한 달에도 수차례 국내외로 출장을 다녀야 하는 일정 탓에 조금 지쳤다고 했다. 그래서 5~8일 전남 화순 힐링센터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며 지친 마음을 내려놓고 주위를 돌아볼 예정이다. 하지만 그는 휴가 기간에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한다. 또 다른 꿈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통일을 위한 민간단체인 사단법인 1090 평화와 통일운동에 감사로 참여해 남북 교류 협력에 앞장서고 있다. 

“‘1090’은 10대부터 90대가 동행한다는 의미로, 든든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 교류, 평화와 통일에 대한 공감대와 활동 공간을 넓히자는 취지로 출범했습니다. 갓난아기용 조제분유를 북한에 보내는 등 민간 차원에서 통일의 물꼬를 트는 데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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