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등의 큰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 사고는 우리 사회구조에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당시 성장하기 시작한 시민사회의 화두도 되지 못했다. 그저 안전불감증이라는 누구의 책임이랄 것도 없는 안이한 결론만 떠돌다 일상으로 돌아갔다. 

 

세월호 사건 이후 ‘하인리히 법칙’이 주목받고 있다. 산업재해로 중상자가 1명 나오면 이전에 같은 원인의 경상자가 29명, 다칠 뻔한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에 달한다는 한 보험회사 직원의 통계 분석이다. 

우리나라는 산재율과 교통사고 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다. 지난해 9만여 명이 산재를 당했고 교통사고로 5000여 명이 사망하고 178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300번의 징후와 29번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로서의 사고는 고스란히 개인과 가족의 몫이 된다. 사고 이후 개인이 어떻게 무너지고 가족이 어떻게 파괴됐는지 우리 사회는 철저히 외면해왔다. 그런데 단원고 2학년 학부모들이 그러한 고통의 개인화를 거부하고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7월 24일 침몰 100일을 맞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요구는 단순하고 근본적이다. 우리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그 진실을 알고 싶다는 것이다. 유가족들이 원하는 특별법은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이미 가족들은 보상에는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무엇이 유가족들을 그렇게 급진적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통해 세월호 침몰의 진상을 규명하고 다시는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자고 한다. 유가족들은 해경의 해체나 유병언의 재산 몰수라는 눈가림에 속지 않을 기세다. 어쩌면 지난 100일 동안 유가족들은 이 사회의 본질을 더 뼈저리게 느낀 듯했다. 보상 따위는 필요없다며 송전탑을 반대한 밀양과 청도의 할매들이 깨달은 것처럼 가장 힘없고 약한 농촌 할매들의 삶이나 인권 따위는 무시해도 된다는 우리 사회 힘과 권력의 논리 말이다.       

 

일부는 세월호로 인해 경제가 어려워졌으니 이젠 좀 그만하라고 한다. 실제로 많은 국민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 삶의 일부가 세월호 어딘가에 닿아 있을 것 같은 양심의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지금 경제가 너무 어려운 것도 맞다. 그러나 우리 모두 다 어렵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2001년 이후 기업의 실제소득이 16.5% 증가할 때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2.3% 상승하고 비정규직 임금은 1% 증가했다. 대기업만 배불렀던 것이다. 그런 경제라면 이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 세월호 경제의 진실이다.  

여성운동은 지금까지 여성들만이 타인을 돌보는 역할을 해왔고 그 역할을 남녀가 평등하게 나누어야 한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는 생명을 지키고 살려내는 여성적 가치가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되지 않는다면 작은 운동조차 성공하지 못하는 상황을 종종 목격하곤 한다. 세월호 이후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은 성장과 개발을 계속 고수할 것인지, 인권과 분배, 정의로 갈지 선택의 기로에서 치열하게 갈등할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끝까지 진실을 밝히고 기업의 이윤 추구와 이윤을 보호하는 권력을 바꾸어내고 생명과 돌봄의 여성적 가치가 사회정책의 근간이 되는 근본적 전환점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결코 쉽지는 않지만 그러한 성찰이 시작됐다. 29번의 경고와 300번의 징후를 보였을 세월호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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