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축구 간판 공격수 박은선(28·서울시청)이 러시아 여자프로축구 로시얀카WFC로 이적한다. 서울시청은 지난 22일 박은선의 이적을 승인했고, 박은선 선수는 메디컬테스트를 위해 이번 주말 러시아로 출국한다. 국내 여자축구 WK리그를 거쳐 유럽으로 진출하는 것은 그가 처음이다. 지소연(23·첼시 레이디스)에 이어 두번째로 유럽에서 활동하게 됐다. 한국 여자축구계 역사를 새로 쓴 경사지만, 기쁜 마음으로 보내기에는 씁쓸함을 떨칠 수 없다.  

 

지난 6월 7일 여성신문과의 인터뷰 당시 모습.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 6월 7일 여성신문과의 인터뷰 당시 모습.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서울시청이 박은선의 러시아 이적 승인을 공식 발표하기 하루 전인 지난 21일, 한국여자축구연맹(이하 여자연맹)이 박은선의 성별 진단을 요구한 WK리그 감독들의 행위를 성희롱이 아닌 것으로 규정하고, 낮은 수준의 징계인 ‘엄중 경고’ 조치에 그쳤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해당 감독들이 충분히 반성한다는 점을 고려한 결과라는 것이 대한축구협회의 설명.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올 2월 WK리그 감독들의 행위를 성희롱으로 규정하며 여자연맹과 협회 등에 해당 감독들에 대한 징계와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으라고 권고한 바 있다. 

하지만 적절한 징계는 없었다. 보여주기 식에 그친 솜방망이 처벌은 이번 사건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낸 박은선 선수를 두 번 죽이는 꼴이 됐다. 박은선은 지난 6월 7일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해당 감독들과 경기장에서 부딪히는 것에 대해 “최대한 신경쓰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훈련에만 집중하려고 하고 있다”며 애써 담담한 모습을 보인 바 있다. 그의 해외 진출을 편하게 바라볼 수 없는 이유다. 박은선의 이적은 해외 진출을 적극 희망한 그의 의지와 별개로 해당 감독들을 현장에서 마주쳐야 하는 부담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스포츠 지도자들의 잘못된 처사를 방관하다시피하는 한국 축구계에 대한 아쉬움도 있을 것이다.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는 “여자연맹의 징계결과를 협회에서 승인했을 뿐 구체적 과정에 대해선 관여하지 않는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해당 감독들의 행위를 성희롱으로 인정하지 않은 여자축구연맹은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한축구협회는 여자연맹의 징계 결정안을 승인해 지난 17일 인권위에 보고했다. 이와 관련 사건조사를 담당했던 이수연 인권위 성차별팀장은 “협회의 보고 내용에 대한 수용여부는 다음주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결정한다”고 말했다. 한편 서울시청 측은 “징계 결과에 대한 구단 측의 입장 발표 여부는 이른 시일 내 논의를 거쳐 결정할 것”이라고 전했다.

 

서울시체육회는 지난해 11월 박은선 선수 성별 논란과 관련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당시 김준수 서울시체육회 사무처장(왼쪽)이 6개 구단 감독들의 회의내용이 든 서류를 들어보이고 있다.
서울시체육회는 지난해 11월 박은선 선수 성별 논란과 관련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당시 김준수 서울시체육회 사무처장(왼쪽)이 6개 구단 감독들의 회의내용이 든 서류를 들어보이고 있다.

백미순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인권위의 성희롱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은 여자연맹과 축구협회의 처사는 국가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와 같다”며 “선수들의 인권이 보장되고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돼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데, 기본이 지켜지지 않은 이런 상황에서 선수들에게 어떤 역량을 기대할 수 있는가”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백 소장은 “직장 내 성희롱 피해 방지 보장도 확장되는 추세에서 유독 언제까지 스포츠계만 이런 문제에 대해 외면하고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진행할 지 답답하다”며 “여성 선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 선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훌륭한 선수를 키워내기 위해선 리더들의 의식 전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떠나는 선수도 보내는 이들도 마음이 불편하다. 여자축구는 올 9월 열리는 인천아시안게임과 내년 6월 캐나다 월드컵 본선무대를 앞두고 있다. 박은선은 지난 5월 베트남에서 열린 여자 아시안컵에서 6골로 득점왕에 오르며 대표팀의 12년 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에 기여했다. 박은선은 한국 여자축구의 귀중한 자산이다. 그의 존재는 앞으로도 한국 여자축구계에 큰 힘이 될 것이다. 축구계에 끊임없는 비판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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