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자기결정권, 적극적조치 등 명시적 표현 필요

 

서울시 종로구 헌법재판소 내 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현행 헌법 영인본.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서울시 종로구 헌법재판소 내 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현행 헌법 영인본.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젠더 관점의 개헌이 시급하다. 지난 30여 년 동안 여성의 삶과 현실은 급변했음에도 불구하고 1987년 이후 개정되지 않은 우리 헌법 속의 ‘여성’은 여전히 30년 전 ‘차별받지 않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에 변화된 여성들의 현재 상황과 미래의 모습까지 담을 수 있는 젠더 관점의 개헌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여성 법학자들은 우선 헌법이 갖고 있는 ‘여성상’이 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인권·안전정책센터장(법학박사)은 “헌법이 생각하는 여성은 ‘차별받지 않으면서도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요약될 수 있다”며 “곳곳에 여성에 대한 보호 조항들이 있는데 차별과 보호를 애매한 형태로 공존시켜 놓은 부분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박 센터장은 “현실의 여성 모습과 미래지향적인 앞으로의 여성 모습까지 포함시키려면 기본권에 대한 체계와 내용, 구조를 전면적으로 바꿔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헌법이 갖고 있는 여성에 관한 추상적이고 선언적 표현도 문제다. 김엘림 한국젠더법학회 회장은 “우리나라 헌법이 어느 나라 헌법보다 여성에 관한 조항들이 여럿 있지만 추상적이고 선언적”이라며 “성별에 의해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등의 적극적 표현이 없다”고 꼬집었다. 실제 헌법 제34조 3항은 “국가는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돼 있고, 제34조 4항은 “국가는 노인과 청소년의 복지 향상을 위한 정책을 실시할 의무를 진다”고 명시돼 있다. 여성의 복지와 권익을 위해서는 ‘노력하라’고 표현하고 있고, 노인과 청소년의 복지 향상을 위해서는 국가에 ‘의무’를 부여하고 있어 차별적이다. 이러한 현행 헌법의 한계 때문에 ‘실질적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소극적 의미의 차별 금지가 아니라 적극적 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적극적 조치’ 등의 명문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헌법은 가족에 대해서도 한계를 갖고 있다. 헌법 제36조 1항은 가족에 대해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한부모·조부모·다문화·동성애·공동체 가족 등 다양해지는 가족의 형태를 포괄하는 데 한계를 가진다. 박선영 센터장은 “국가가 특정 가족의 모델을 제시하고 이를 강제하는 것은 개인의 행복추구권과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수 있다”며 “가족의 다양성을 헌법이 수용하기 위해서는 동성·이성을 불문하고 그들에게 가족 형성의 자유와 권리를 기본권으로 명확하게 규정하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우리 헌법은 1987년 마지막 개헌 이후 27년간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1987년 이후 우리 사회는 급속한 변화를 겪어왔지만 시대와 현실을 반영하고 발전적 미래의 가치까지도 포함해야 할 헌법은 30여 년 전에 머무르고 있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지속돼 왔다.

정치권에서의 개헌 논의는 본격적이진 않지만 계속돼 왔다. 지난 5월 취임한 정의화 국회의장도 취임 이후 개헌을 위한 논의의 장을 만들겠다고 입장을 밝힌 바 있으며, 국회의원 155명이 참여하고 있는 ‘개헌추진 국회의원 모임’에서도 4년 중임 분권형 대통령제 등을 제안하며 개헌 논의를 본격화할 뜻을 보이고 있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권에 도전하는 의원들도 다들 개헌 공론화를 들고 나왔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주로 논의되는 개헌의 내용은 통치구조와 관련된 것이어서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찾아보기 힘들다. 합의가 어려운 통치권 중심의 개헌 논의가 개헌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여성과 가족 분야 외에도 아동의 권리, 생명권, 환경권, 주한 외국인들의 권리, 정보보호 등 시대의 변화로 헌법이 수용해야 할 기본권들에 대한 논의가 시급하다. 통치구조에 국한된 개헌 논의를 넘어서 국민의 다양한 기본권을 위한 개헌논의를 서둘러 시작해야 할 것이다. 

 

서울시 종로구 헌법재판소 내 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제헌 헌법(영인본).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서울시 종로구 헌법재판소 내 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제헌 헌법(영인본).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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