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의 시간들이 보약 됐어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을 찰 수 있는 시간이 몇 년 안 남았어요. 조급해하지 않고 차근차근 1년 동안 열심히 준비할 겁니다.” 

그는 의연했다. 아픔의 터널을 지나며 한층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성별 논란을 겪은 후 더욱 단단해진걸까. 박은선(28·서울시청) 선수는 선수생활 최대 무대인 월드컵 출전에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가 포함된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은 지난 5월 베트남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아시안컵에서 종합 4위를 기록, 내년 캐나다에서 열리는 여자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게 됐다. 2003년 미국 월드컵 이후 무려 12년 만이다. 대표팀의 월드컵 본선 진출에 그의 공은 컸다. 5경기에서 6골을 뽑아내 득점왕에 오른 박은선은 9년 만의 A매치 출전이라는 공백이 무색하게 국제무대에서 변함없는 실력을 보여줬다.  

‘마지막’이라는 말에 다시 물었다. 현역 은퇴 후 지도자로서도 월드컵 무대에 나갈 수 있지 않느냐고. 그는 “우리나라에선 힘들 것 같다”며 손사래를 쳤다. 여성 국가대표 감독을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덧붙여 그는 “문제도 많았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한국 최고의 스트라이커인 그의 입에서조차 불가능이라는 말이 나왔다. 스포츠계에 존재하는 높은 ‘유리천장’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축구 천재에게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에 고교 졸업 후 바로 서울시청 실업팀에 입단한 그는 한국여자축구연맹으로부터 ‘연맹 주관 대회 2년간 출전 금지’라는 중징계를 받고 방황의 길을 걷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들은 대학에 입학해 2년간 뛰어야 한다’는 선수선발 세칙 제3조 3항을 어겼다는 이유였다. 당시 열리는 대회에서 절반 이상의 경기를 출전할 수 없게 된 그는 높은 현실의 벽과 어른들에 대한 불신, 축구에 대한 회의감으로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다. 선수생활을 쉬는 동안 호프집, PC방, 야구장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마음을 다잡고 팀에 복귀한 그는 여자축구 실업리그인 WK리그 2012 시즌에서 10골을 넣었다. 지난해에는 20경기에서 19골을 넣으며 중하위권이던 팀 성적을 2위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승승장구하는 팀에 제동을 걸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서울시청을 제외한 WK리그 6개 구단 감독들이 그에게 성별검사를 요구하며 리그 보이콧 행패를 부릴 때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다시 찾아온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여기서 나가면 네가 지는 거다. 이런 때일수록 최선을 다하라”는 서정호 서울시청 감독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팀 동료들과 친구들 무엇보다 가족이 큰 힘이 됐다. “옆에서 위로를 많이 해줬어요. 자기 일도 아닌데 저보다 더 화를 많이 냈죠. 감독님도 계속 좋은 말씀 해주시고 제가 힘들어하니까 쉬게 해주시고 신경을 많이 써주셨어요. 그 논란이 있고 나서 저희 오빠는 그냥 운동 관두라고, 자기가 먹여 살리겠다고까지 했어요. 집에서 막내인데 고생을 하니까 다들 걱정해주셨죠.”  

그에게 가족은 든든한 지원군이다. 1남2녀 중 막내딸인 그는 어릴 적부터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6살 위의 오빠와 4살 위의 언니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는 어머니 이종순 씨가 그의 곁에 항상 있었다. 지난 2010년 골수암 투병 중 돌아가신 아버지 박순권씨도 지금의 박은선이 있기까지 원동력이 됐다. 순간 그의 얼굴엔 아버지를 향한 진한 그리움이 묻어 나왔다. “항상 경기 있는 날이면 찾아와 보시고 부족한 점을 지적해주시곤 했어요. 아빠와의 추억이 많아요. 유치원인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한 번은 택시운전을 하던 아빠가 절 조퇴시키고 부산까지 내려가 같이 야구를 본 적이 있어요. 계곡에서 놀던 생각도 나네요. 고등학교 땐 처음 부상당하고 많이 힘들었는데 일하시던 아빠가 병원에 오셔서 따로 데리고 나가 피자 한 판을 사주셨던 적도 있어요. 많이 보고 싶네요.”

주변 사람들의 응원과 지지에 힘입어 그는 재도약했다. 현재 목표를 묻자 “더 늦기 전에 해외에 진출해보고 싶다”는 예상했던 답이 돌아왔다. “이번에 아시안컵 대회 나가서도 느꼈어요. 국내에만 있으니 우물 안 개구리더라고요. 다른 리그에서도 배우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지금도 잘하는 건 아니지만 저의 부족한 점을 더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뛰고 싶은 리그는 스웨덴 리그와 좋아하는 선수인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속해 있는 파리 생제르맹의 여자리그. 이번 아시안컵에서 호흡을 맞췄던 지소연(23‧첼시 레이디스) 선수는 “언니 왜 해외 진출 안 하냐. 나가면 충분히 잘할 수 있다”고 격려해줬다고 했다.

아픔을 딛고 일어선 그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그라운드를 떠나 있는 동안 축구의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 그는 아픔의 시간들이 오히려 약이 됐다고 말했다. “예전의 안 좋은 경험들이 저한테는 오히려 득이 된 것 같아요. 사회에 나가 일을 해보니 축구선수 생활이 얼마나 소중한지, 또 제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이 축구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운동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축구에만 전념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