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6주년을 맞은 올해 여성신문이 내건 슬로건 ‘여성이 평화다’는 평화를 향한 용기 있는 도전이 국민행복시대를 여는 필수조건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여성신문은 우리 사회에서 ‘평화’ 관련 논의가 활발해지길 바라며 연중 다양한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김동진 평화문화연구원 원장의 평화칼럼을 연재한다. 

평화란 무엇인가?

한반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평화는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익숙한 구호다. 하지만 아무리 익숙한 말이라도 그 의미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갑자기 생경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또 아무리 자주 사용하는 말이라도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알고 보면 내가 사용하는 말의 의미와 다른 사람이 의미하는 바가 줄곧 달랐을 수도 있는 것이다. 평화도 그렇다. 우리가 말하는 평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생각하는 한반도 평화와 상대가 생각하는 한반도 평화는 과연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가?

20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인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그리고 6·25전쟁이라는 끔찍한 전쟁의 고통을 연이어 겪게 됐다. 이후 냉전시기를 거치며 평화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탄생했다. 평화학은 말 그대로 평화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구하는 학문이다. 평화학자들은 다시는 전쟁의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은 세계인들을 향해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평화가 무엇인지를 질문하기 시작했다.

어떤 세계인들에게 평화는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과 같이 남들이 쉽게 넘볼 수 없는 강한 군사력을 의미했다. 서로를 믿을 수 없는 무질서 상태의 냉혹한 국제사회에서 강한 군사력이 있다면 다시는 전쟁의 고통을 경험하지 않아도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에게 평화는 상대를 좌지우지할 만한 강한 경제력을 의미했다. 상대가 자신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되면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함부로 자신을 공격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군사적으로 약하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나라는 평화를 가질 수 없다. 힘없고 가난한 나라는 언제라도 전쟁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평화는 힘센 부자 나라가 누릴 수 있는 것일까?

평화학자들의 연구는 이에 대해 아니라고 답한다. 세계의 역사 가운데 어떤 강대국도 전쟁의 위협에서 자유로운 국가는 없었다. 강한 힘으로 상대를 억누르고 종속시키는 방식은 바로 그 억압적 방식에 대한 다른 국가와 사람들의 불만을 증가시키면서 오히려 자신에 대한 전쟁 위협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다시 말해 군사력과 경제력으로써의 평화는 그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다. 따라서 평화학자들은 단순히 힘으로 ‘전쟁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불안정한 평화가 아니라 전쟁의 근본 원인을 해소해 사람들이 ‘굳이 전쟁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상태’를 만들어 나가는 지속가능한 평화 프로세스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평화학자들에게 평화는 더 이상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고 유지하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싸워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만큼 인간의 기본적 욕구가 존중되고, 서로 화해하며 평화적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상당히 적극적인 의미를 갖게 됐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적극적 의미의 평화가 무질서 상태의 국제관계에서 과연 현실성이 있는 것인지, 그리고 적극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평화의 의미가 과연 어디까지 확장돼야 하는지에 대한 비판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평화학자들은 이러한 비판에 다시금 되묻는다. 전쟁의 악순환이라는 갈등 현실 속에 자신의 힘에만 의존하면서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의 불안 가운데 사는 것이 과연 현실적인 평화인가? 그동안 정답으로 여겨져 왔던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지속가능한 평화를 보장해주지 못한다면, 당연히 이에 머무르지 말고 각 지역과 상황에 따라 전쟁의 근본 원인을 해소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계속해서 탐구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날 한반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들 평화학자들의 질문은 유효하다. 우리에게 평화란 무엇인가?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한 강대국이 되는 것인가? 강대국이 되면 60년이 넘게 시달려 온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데 세계 10위권의 군사력과 경제력보다 얼마나 더 강한 힘을 가진 강대국이 돼야 마침내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는 무엇인가? 평화학자들의 연구에 한번 귀를 기울여 보자. 한반도의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싸워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만큼 서로를 존중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평화 프로세스는 비현실적 상상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계속해서 질문해야 할 새로운 탐구와 새로운 실천의 영역일 뿐이다. 우리가 한반도의 갈등 현실에서 소극적 의미에 안주하지 않고 평화의 적극적인 의미를 계속해서 묻는다면, 이는 우리에게 보다 구체적이며 지속가능한 새로운 평화의 현실을 제공해줄 수 있다. 다시 한번 함께 질문해 보자. 평화란 무엇인가?

김동진 평화문화연구원 원장은

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한신대학교 외래교수이자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평화나눔센터 연구위원과 대북지원민간단체협의회 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중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이기도 한 그는 호주 시드니 대학교(University of Sydney)에서 평화학 석사를,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학 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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