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하직해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던 고정희 시인. 해남 출신인 고 시인은 75년 등단한 이래 또 하나

의 문화 동인, 88년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역임하는 등 여성운동

의 한가운데서 열정을 불태운 이로 지인들에게 기억된다. 이런 그의

시비가 광주의 남성문인들에 의해 시민들이 빈번히 드나드는 광주문예

예술회관, 그중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장소인 야외 원형광장에 세워져

잔잔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난 10월 18일 오후 3시에 거행된 고 시인의 시비 제막식은 동향의

문인친구들과 서울에서 내려간 지인들이 시인 생전의 추억을 떠올리며

공감대를 정겹게 형성한 자리였다. 시비 앞면엔 고 시인의 ‘상한 영

혼을 위하여’가, 뒷면엔 그의 약력과 함께 시창작에 있어 고정관념적

여성주의에서 탈피하고 시대적 아픔에 대한 분노를 힘차고 당당한 서

정으로 고양시켜 실천적 의지와 전망을 참신한 표현으로 보여주었다는

평가로 시비 선정의 이유가 밝혀져 있다.

축사에서 여성신문 이계경 발행인은 고 시인을 후대가 즐기고 음미할

수 있는 시를 남긴 ‘행복한 페미니스트 시인’으로, 김경천 광주

YWCA 사무총장은 자신도 이런 자리에 시비가 설 수 있다면 당장 죽

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란 요지의 말로 고인을 새삼 기렸다.

6월부터 건립위원회를 구성, 시의 지원과 함께 시비사업을 추진해 결

실을 거두기까지 총사령관 역할을 해낸 광주광역시 문인협회 김종 회

장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요절한 여성시인의 시비가 외진 곳이 아닌

공공장소에 세워졌다는 것은 일종의 ‘파격’으로 예술회관 관장등 공

무원들의 ‘열린’ 사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처럼 좋은 시인의 시

를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 기억시켜 사랑받게 하는 것은 뒤에 남은 이

들의 몫이며, 아울러 ‘쓸만한’ 문화풍속을 만드는 것 아니겠는가”

라는 반응을 보인다. 그는 또한 광주의‘눈’같은 자리에 세워진 고

시인의 시비 앞에서 많은 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깊은 관심을 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아, 이제는 됐다”는 안도감을 느꼈다고 토로한다.

조형미도 탄탄히 다듬어졌다는 평을 듣고 있는 이 시비는 앞으로 광

주의 명소가 될 전망이어서, 많은 이들을 흐뭇하게 하고 있다.

'박이 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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