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섭의 영화 속 인물 탐구] '겨울왕국'의 엘사

“옛날 옛날 손에 닿는 모든 걸 얼릴 수 있는 공주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고전 전래동화가 있었던가? ‘겨울왕국’ 엘사는 왕자 없이, 사과나 거울 없이, 난쟁이 돌보기 없이도 혼자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겨울왕국의 새로운 여주인이시다. 커다란 눈동자 속에 얼음 알갱이가 박혀 있어야 했던, 혹은 차가운 눈더미 속에서 성냥 한 개비로 버티며 죽어가야 했던 불행한 소녀가 아니라는 말씀. 모든 찬 것은 그냥 차다는 이미지를 벗어던진. 안데르센 아저씨를 배신하고 북구동화에서 튀어나와 살가운 자매애로 다시 뭉쳐 여성의 주체적 자기 되기 과정을 보여주는 그녀. 이 캐릭터는 여성주의적 시각을 모두 모은 현대적 공주 캐릭터의 정점에 서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엘사의 강박관념은 그녀의 노래 ‘렛잇고(Let it go)’에도 나왔듯이 ‘착한 소녀(Good girl)’가 되는 데 있다. 동생의 둘도 없는 놀이 친구였고, 자신의 능력을 인식하지 못할 때는 모든 것을 얼리는 재능이 즐겁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통제할 수 없는 분노와 결합한 그녀의 얼음사탕 만들기 재능은 스스로와 가족을 위험에 빠뜨리는 폭풍의 핵이 된다. 부모는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한 후, 자신의 방 안에서만 갇혀 자라게 한다. 아무리 동생이 문을 두드려도, 소리 한 점 낼 수 없이 마음의 방에 갇혀 산다.

엘사의 성장 과정은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빠져 사는 소녀들, 성공 공포를 느끼며 대인관계를 회피한 채 마음의 방에 스스로를 유폐한 여자들, 자신의 재능을 평가절하하는 모든 여성들의 유년기를 대변하고 있다. 당신의 신비로운 마법을 억제하기 위해 두 손에 무엇을 끼고 살았는가? 얼음을 얼리는 재능은 여성이 두려워하는 모든 남성성, 일탈 충동, 써본 일이 없는 억압된 자아, 소수자의 자기 숨김 등의 다양한 은유로 여성들에게 변주될 수 있다.

그런 엘사도 처음에는 문제와 맞닥뜨리자 도망과 도피를 선택한다. 대관식 날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들킬까 안절부절못하는 엘사는 드레스를 갖춰 입은 동생 안나와 만나게 되자, 정말 예뻐 보인다며 좋아라 한다. 그녀는 대관식날 처음 만난 한스 왕자와 결혼하겠다는 철없는 동생을 극구 말린다. 심지어 ‘노’라는 말까지 한다. 그런 가운데 안나와 다투게 되고, 안나가 실수로 그녀의 장갑을 벗기자, 그녀의 마법은 온 천하에 드러난다. 강제적인 커밍아웃과 자발적인 유폐의 과정. 흥미롭게도 이런 엘사의 숨은 능력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사람은 제 야심과 권력만을 추구하는 이중적인 왕자 한스다.

결국 엘사는 한스에 대항하며 옥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들면서 깨닫게 된다. 억압은 스스로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며, 문제에서 도망가도 아델렌이란 현실은 계속 거기에 있다는 것을. 패비 할아버지가 “두려움은 공주님의 적이 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 let it go.

엘사는 자신의 능력이 스스로에 의해 통제 가능하다는 것을 배워야 하고 배우고 있었다. 권력만을 추구하는 남성들이 가득한 현실에서 엘사의 선함은 무기력하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엘사는 자신의 재주로 스케이트장을 만들어 왕국의 백성들과 함께 놀며 즐길 수 있는 처자로 변모한다. 스스로를 괴물 취급하지 않고,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재능이 꽃피우는 것을 본다. 그러니 우리 역시 권력만을 추구하는 한스에게 외로움이라는 형벌이 스며들 때까지 그를 추방해버리고,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만들어낸 눈사람 올라프에게 여름을 즐기도록 눈구름이란 선물을 주면서.

엘사는 한 여성 안에 깃든 모성적이고, 신중하고 품위 있는 선한 자아의 모든 것이다. 외모 지상주의, 왕자를 기다리며 질투와 시기·경쟁심에 몸을 떨고, 의붓엄마와 의붓자매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죽고 죽였던 남성주의 시각을 서서히 탈피하기 시작한 새로운 디즈니의 캐릭터이기도 하다. 슈렉의 피오나 공주와 함께 매일 밤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애정하게 된 공주여. 얼음으로 이루어진 세상 그곳에, 차갑지만 아름답고 따뜻한 엘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