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여자’ 신화는 남성 판타지의 전유물이자 여성을 통제하는 기제

 

지난해 3월 10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28회 한국여성대회’에서 비키니 차림의 여성 참가자가 서울역 광장으로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http://lensbyluca.com/withdrawal/message/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cialis coupon free discount prescription coupons cialis trial coup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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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여성신문

성희롱을 당할 수 있는 상황, 접근하는 직장 상사를 향해 “저는 그런 여자 아니거든요!”라고 쏘아붙이는 여직원의 울분을 들었다.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을 위한 상황극에서였다.

‘왜, 하필 저런 대사를 썼을까?’ 나는 너무나 당황해서 수정을 요청했는데, 강사는 수많은 곳에서 강의를 했어도 문제가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토로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그런 여자가 아니다’는 표현은 너무나 익숙한 것이다. ‘그런 여자’가 정확히 누구인지, 본 적은 없어도 말이다. 아마도 정숙하지 않은 여자, 성적으로 헤픈 여자, 술집 여자, 접대부, ‘창녀’ 따위를 떠올리며 사용했을 것이다. 문맥으로 보자면, 한마디로 ‘성희롱을 당해도 좋아라 할 수 있는 여자’다. 그런데, 세상에 ‘그런’ 여자가 있을까?

이러한 저항 방식, ‘그런 여자가 아니다’라는 선언은 인간으로서의 존중감과 공간성을 확보하려는 여성들의 노력과 전략을 보여준다. ‘직장 내 성희롱’처럼 여성들은 남성의 성적 대상이 되길 강요받아 왔다. 이에 여성들은 ‘그런 여자’에 대한 부정을 통해 성적 대상으로 취급받는 것에 저항해 온 것이다.

게다가 우리 사회에는 ‘그런 여자(창녀)’에 대한 깊은 혐오와 거부감이 내재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을 성적인 정숙함으로 구별 짓고, 마리아/창녀, 모성(아내)/성적 노리개로 그 역할을 구분하는, ‘여성 이분화’는 여성을 분리해 통제하는 전형적 방법이다. 여성들은 섹시해야 하지만, 동시에 ‘창녀’ 같으면 안 된다. 옷을 입거나 말을 할 때도 여성들은 암암리에 그 존재를 떠올리고, 콘돔을 제안할 때도 ‘헤픈 여자’로 보이지 않을까 주춤하게 된다.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성적으로 매력적인 존재가 돼야 한다는 가치뿐 아니라, 정숙함을 지켜야 할 존재로 사회화돼 왔다. ‘그런 여자(창녀)’는 오염의 경계를 표시해준다. ‘나’와 ‘그런 여자(창녀)’를 구별 짓는 일은 여성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이고, 우리 안에도 혐오(phobia)가 있다.

전형적인 ‘여성’의 입장에서 자신이 ‘그런 여자’가 아님을 증명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낙인찍히는 것은 여성 주체가 부정당하는 것이자,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추방됨을 의미하며, 남성의 성적 접근과 강간 신화에 노출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여자(창녀)’라는 낙인은 정숙함의 책임 위반자에 대한 처벌로 기능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더럽혀진 존재’로 의미화되는 ‘그런 여자(창녀)’라는 상징에는 성을 파는 여성뿐 아니라, 성폭력, 간통, 자유연애 등 가부장제 사회에서 ‘정숙함’으로 간주되지 않는 거의 모든 여성의 성을 포함한다. 여성은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 책임과 더불어 낙인을 갖게 된다. 그 내용의 핵심에는 ‘여성은 스스로 파괴되길 원하는 존재’라는 강간신화(원인유발론)가 자리한다.

‘그런 여자 아니다’ 신드롬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여성에 대한 강간이나 폭력, 착취 등을 무화시킨다는 사실이다. 성산업 종사자의 강간 사건에 대해 “한 번 당하나, 여러 번 당하나 마찬가지일 텐데, 왜 신고까지 하느냐?”는 경찰의 발언은, 성을 파는 여성은 사회가 보호할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평가뿐 아니라, 그 바탕에는 ‘스스로 원한 것’이라는 강간신화가 자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성희롱을 당해도 좋다면 그건 더 이상 성희롱도 아니다. ‘그런 여자’에게 행해지는 순간 성희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범죄가 된다. ‘그런 여자’에 대한 판타지가 존재하는 한 성희롱, 성폭력, 강제 성병검진, 위안부 동원 등은 면죄부를 얻는다. 이렇듯 강간신화에 기반한 ‘그런 여자(창녀)’에 대한 낙인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접근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허구적 기제다.

더욱이 특정 집단은 낙인에 대해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엔터테이너 등 성적 이미지와 결부된 영역에서는 섹시함을 요구받을지라도 자신은 ‘창녀’가 아님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더 빈번히 노출된다. 성폭력의 희생자들은 피해자임에도 자신들이 ‘창녀’와 다른 존재임을 증명해야 하는 부담감을 갖는다.

일제강점기 군 위안부를 지낸 할머니들의 성을 파는 여성에 대한 민감하고도 부정적 반응이나, 미군과 결혼한 한국인 아내들은 자신이 기지촌 출신 여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상황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면 사회적 존재로 인정받을 수 없는, 낙인의 끔찍함을 보여준다. 여성은 ‘그런 여자’가 아님을 증명해야 ‘공공의 성적 존재’라는 누명과 강간신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나는 그런 여자 아니다’ 신드롬은 남성의 성적 접근에 대항하며 살아온 여성들의 생존 전략이자 증후다. 문제의 핵심은 여성들의 투쟁이 ‘그런 여성’처럼 취급받는 것에 대한 대항이었다는 점이다. 즉 ‘접대부에게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가 아니라, ‘나/우리는 접대부가 아니다’라는 부정의 방식을 취해왔다는 것이다.

성적 위계에서 비교적 안전한 위치에 존재하고자 했을 뿐, 남성의 성적 취급에 대한 도전이나 저항으로 나아가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정숙함에 의한 여성의 구별 짓기, ‘창녀’ 신화는 그대로 남겨져 왔던 것이다. 사실 ‘그런 여자’는 특정한 여성이기보다는 ‘여성’ 전반을 보는 남성 지배의 눈이다. 나만 ‘그런 여자’ 아니라고 한들, 모든 여성을 성적 대상물로 취급하는 전제가 소멸되지는 않을 것이다.

예컨대, ‘그런 여자’라는 말에는 스스로 파괴되길 원하고 강간당하길 바란다는 강간신화와 여성혐오, 남성 판타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남성 판타지는 아마도 ‘그런 여자’의 존재를 바라고 바랄 것이다. 남성의 성적인 대상물로 취급당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 ‘여성’ 말이다. 단연코 세상에 ‘그런 여자’는 없다.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성을 파는 일을 한다고 해도 말이다. 또한 설령 ‘그런 여자’에게라도 ‘그렇게 하면(성희롱, 성폭력, 강제 성병검진, 위안부 동원 등)’ 안 된다. ‘그런 여자(창녀)’ 신화는 남성 판타지의 전유물이면서 동시에 여성을 통제하는 기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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