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 갖지 말아야
‘괴물은 없다’… 성폭력은 일상 속 관계의 문제
“최근 몇 년간 온 사회가 성폭력 얘기만 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극단적인 사건만 부각되면서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과장되고 강요되고 있어요. ‘괴물’ 같은 가해자와 그에 대한 분노, 처벌, 그것을 피하기 위한 회피의식과 두려움, 경각심으로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한정되고 있습니다.”
20일 개소하는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성폭력 전문 연구소인 ‘울림’ 초대 소장을 맡게 된 권인숙(50) 명지대 교수는 “성폭력에 대한 과장된 공포는 성폭력을 직시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두려움은 많은 사람들이 유사 상황에서 대처를 못 하게 한다”며 “자신의 몸에 대한 믿음과 당당한 방어능력을 가질수록, 과도한 피해의식이 적을수록 대처능력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성폭력을 최대한 막으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만 과도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사람들이 삶을 포기하거나 자율성을 침해하는 방식은 안 됩니다.”
울림연구소는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 24년간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을 지원하며 축적한 자료와 경험을 바탕으로 성폭력 없는 문화와 반성폭력 이론, 법 정책 제도를 제안하기 위해 설립됐다.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피해자 유발론 같은 왜곡된 성폭력에 대한 통념은 여전하고 일상적인 성폭력은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권 소장은 “성폭력은 서로 아는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관계의 문제”라며 “성폭력 피해자뿐만 아니라 누구나 쉽게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괴물’ 같은 가해자와 전형적인 ‘피해자다운’ 피해자라는 단순한 프레임을 떠나 성폭력의 복잡함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4대악 척결 등 정부의 성폭력 근절 대책이나 언론의 과도한 보도 경쟁이 성폭력에 대한 단순한 프레임과 통념을 강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권 소장은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은 높아졌지만 기본 정보나 성폭력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인식이 낮다”고 말했다.
“아동성폭력에서 남자아이들도 피해자가 많은데 성폭력 피해에 대한 관심은 여자아이들에게 집중돼 있습니다. 또 여전히 여자아이들의 옷차림이 성폭력을 막는 데 중요한 요소라는 잘못된 생각이 강합니다. 가해자를 괴물로 생각하는 왜곡된 인식 때문에 자기 아이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아요.”
울림연구소는 권 소장과 함께 책임연구원 1명과 연구원 2명이 꾸려가게 된다. 개소를 앞두고 이미 ‘피해자다움’, ‘성폭력과 모성’ 등 몇몇 프로젝트 연구를 진행 중이다. 오는 6월에는 아동성폭력 가해자들을 인터뷰한 번역서 ‘괴물이 아니다’도 출간할 예정이다. 앞으로 울림연구소는 기존의 연구들을 진행하면서 다른 나라의 성폭력에 대한 관점을 해석하고 제안하는 활동을 통해 우리 사회의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통념을 깨고 반성폭력 문화 확산에 일조할 계획이다.
군사문화에 대해 연구를 지속해 온 권 소장은 군사문화와 성폭력의 관계에서 “전부는 아니지만 남성들의 동료의식, 서열구조 확인, 게이가 아닌 것에 대한 증명, 남성성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 등으로서 성폭력이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그는 “다른 나라에서도 위기상황이나 전쟁 중에 성폭력이 늘어나는 조사결과가 있고, 군대 내 성폭력 발생 비율이 다른 집단에 비해 높게 나타난다”고 꼬집었다.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주인공으로 80년대 민주투사로 유명했던 권 교수는 미국에서 여성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여성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2003년부터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