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 년간 109편 영화 만든 살아 있는 ‘한국영화사’
“천만 관객, 한국 영화 본질 향상됐다고 볼 수 없어”
“얼마전 김지미씨를 만났는데 여전히 세련되고 예뻤어요. 2주 전에는 윤정희씨랑 남편 백건우씨랑 같이 밥을 먹었는데 윤정희씨는 언제나 수준 있는 대화를 해요. 최은희씨는 다리가 아파 휠체어에 앉아 있을 때도 품위를 잃지 않고, 황정순씨는 왕비부터 미친 여자까지 어떤 배역을 맡겨도 다 해내는 배우였습니다.”
1953년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해 50여 년 동안 109편의 영화를 만든 김수용(85) 감독은 수많은 작품에서 함께 작업했던 여배우들의 특징을 한 명씩 또렷이 추억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여배우를 꼽아달라는 기자의 요구에 김 감독은 “모두 특색이 있어 한 사람으로 압축하기 힘들다”며 손사래를 쳤다. “미모는 김지미, 지성은 윤정희, 품위는 최은희, 연기는 황정순”이라며 배우들의 특징을 꼽은 김 감독은 “영화에 출연한다고 옛날 그 배우들과 지금의 배우가 동일하지 않다. 열악한 대우를 인내하며 영화에 집중하던 그때 배우들이 더 우러러 보인다”고 말했다.
배우를 비롯해 여성 연예인에 대한 성적 대상화가 심각한 요즘 노 감독의 여배우들에 대한 회상에는 동료 예술가에 대한 존경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었다. 이혼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배우 활동을 했던 이나 장애를 가진 아이 때문에 겉으로는 화려하게 살아도 늘 웃지를 못했다던 배우를 김 감독은 지금도 떠올리곤 한다. 사람과 삶에 대한 그의 깊은 시선은 “내 영화의 결론은 어떤 인간이라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라는 그의 영화 사상에도 그대로 묻어난다.
1953년 한국전쟁 직후 열악한 환경에서 10~20분짜리 군 홍보영화를 찍었던 김 감독에게 최근 천만 관객 시대의 한국 영화산업은 참으로 격세지감일 것 같았다. 하지만 김 감독은 “천만 관객을 반드시 급성장으로 보고 싶지는 않다”고 일갈했다.
“아날로그 시대의 영화인으로 천만 관객은 양적인 팽창일 수는 있어도 영화의 본질이 향상됐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지금 한국 영화계는 기업화돼 수지 균형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어 소위 영화작가의 설 자리가 없어요. 돈이 되지 않아도 명작은 명작으로 남아야 하는데 관객 동원 수가 영화의 수준이 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50여 편의 문학작품을 영화화해 ‘가장 문학적인 영화감독’이라 불리는 김 감독은 작품성뿐만 아니라 흥행에도 대성공을 거뒀다. 1966년 작품인 ‘유정’은 국도극장 1개 관에서 33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250여만 명이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오늘날 천만 관객과 견주어도 흥행성에서 뒤지지 않는다. 또 요즘처럼 개봉관이 많이 없던 시절에도 지방에서 택시를 타면 기사들이 알아볼 정도로 유명한 영화감독이었다. 국민 배우로 큰 인기를 누리던 배우 신성일, 엄앵란보다 더 큰 김 감독의 사진이 개봉관에 붙기도 했을 정도다.
김 감독은 1년에 5편 이상은 영화관에 직접 가서 영화를 본다. 영화 선택의 첫 번째 기준은 감독이다. “마음에 드는 영화와 만나는 게 새해 소망”이라는 노 감독은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와 정지영 감독의 ‘부러진 화살’을 잘 찍은 영화라고 칭찬했다.
“관객 수와 상관없이 감독으로 괜찮은 작업을 했구나”라고 생각이 드는 작품에 애착이 간다는 그는 후배 영화인들의 일자리를 걱정했다.
“영화라는 것은 참 힘든 작업이죠. 영화와 관련해 수천 명씩 대학에서 졸업생이 나오는데 일자리가 없을 겁니다. 상업영화뿐만 아니라 영화를 하는 사람들이 공부하고 일할 수 있는 자리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또 영상문화가 일반인들의 생활과 깊은 연관을 맺어 영화인들이 일할 곳이 많아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