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노동자에서 시의원까지
민주당 비례대표 1번으로 8대 시의회 입성… 여성특위 위원장 맹활약

 

“구로을 지역 발전을 위해 온 힘을 쏟겠습니다.”

한명희(62·사진) 서울시의원의 6·4 지방선거 출사표다. 민주당 비례대표 1번으로 8대 시의회에 진출한 그는 상임위(보건복지위)뿐 아니라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공공의료개혁소위원회 위원장으로 바쁘게 의정활동을 했다. 특히 한강시민위원회 위원으로 한강르네상스, 서해뱃길 예산 2250억원 삭감을 주도했다. 서울환경연합 ‘한강살림이상’ 수상자가 된 배경이다.

“여성특위는 2년 넘게 했어요. 너무 길다고 원성도 있었죠.(웃음) 성평등기본조례를 확산시키고, 장애 여성 일자리도 만들고,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를 위한 결의안도 냈어요. 여성발전기금을 더 끌어내는 역할도 했고요. 특히 지방자치단체들이 성평등기본조례를 만들도록 모델링한 것이 의미 깊었죠.”

‘큰누나’ 같은 한 의원의 노력이 빛을 발해 민주당 의원들은 8대 시의회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는 “30년 노동운동‧여성운동을 한 내공이 있지 않느냐”며 “구슬은 하나로 꿰어 보석을 만들 때 값어치를 할 수 있다고 의원들을 끝없이 설득했다”며 웃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로 지역조직 강화와 여성할당제 운동에 힘쓰던 그가 정계에 진출한 것은 2007년이다. 민주당 미래여성리더십센터 소장으로 비례대표 21번을 받았으나 당선권에 들지 못했다. 그후 갑자기 실업자가 돼 전업주부 생활을 1년간 했다. 고추장, 간장, 매실추출물을 담그며 살림을 했다. 그러다 성공회대 NGO대학원에 입학했다. 57세 때 일이다. 대학원에서 실천여성학을 2년간 파고들었다. 공장노동자 출신으로 열혈 노동운동가였던 그가 육순을 한 해 앞두고 석사모를 쓴 것이다. “사람들이 대학원 갔을 때 이러더군요. 지금 공부해서 뭐하느냐고…. 꼭 무엇을 하려고 공부하는 건 아니라고 답했죠. 쉬고 있을 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 공부가 서울시의회에 들어와 큰 도움이 됐다. 8대 시의회에선 인권이 화두였다. 어린이‧청소년인권조례 제정 같은 인권사업을 견인하는 데 힘이 된 것이다.

구로을 선거구에서 출마할 계획인 그는 최근 구로지역 신년하례식에서 이렇게 출마 선언을 했다. “20년 동안 시어머니와 함께 산 평범한 여성이다. 하지만 한국노동운동사에선 이름 석자 치면 나올 만큼 강력한 노동운동을 했다. 구로공단에서 공순이로 출발해 시의원이 됐다. 구로에 뼈를 묻겠으니 기억해달라.” 그 자리에서 청중을 사로잡은 또 다른 대목이 바로 7살 연하 남편(유광준)과의 결혼일 것이다. 노동운동 후배인 남편은 대우자동차 생산직 노동자다. 그는 “보통의 삶을 살면서도 건강하게 운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나이로 마흔한 살에 아기 엄마 되고, 마흔다섯에 둘째 딸을 낳았다”고 했다. “남편은 대우자동차에서 나 때문에 파업에 앞장서다 해고당했어요. 결혼 발표 했을 때 주변에서 깜짝 놀랐어요. 저는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인데 이 친구(남편)는 고지식해서 늘 다퉜거든요.”

그는 두 딸을 키우면서 “공부는 열심히 안 해도 된다. 좋은 대학에 안 가도 된다”며 대입에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수능에서 한 개 틀리고 연세대에 입학한 큰딸은 나중에 “친구들 사이에서 엄마는 신적인 존재다. 엄마처럼 야단치지 않고 잔소리 안 하는 분은 없더라”고 할 정도였다.

‘한강의 기적’을 이끌었던 구로공단의 공식 이름이 한국수출산업공단이다. 올해는 한국수출산업공단 지정 50년을 맞는 해다. 감회가 없을리 없다. “졸음방지약 타이밍을 먹고 야근하던 일도 생각나죠.” 그가 숭의여고를 졸업한 후 공장에 간 것은 빈곤이 대물림되는 한국 사회에서 당연한 수순 같았다. 6남매 중 셋째였던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공부를 중단하고 열두 살 때부터 ‘애 보기’로 더부살이를 했다. 동생 둘을 데리고 친척이 경영하던 고아원에서 ‘고아 아닌 고아’로 지내기도 했다.

다국적기업 콘트롤데이터에 입사한 것이 스물한 살 때였다. 콘트롤데이터 노동조합의 기세는 대단했다. 경찰이 ‘공단특공대’로 부를 정도였다. 전두환정권이던 1982년 3월 해고자 복직을 내걸고 최초로 파업을 한 사업장이기도 하다. 80~82년 노조위원장을 지내며 그 역시 ‘빨갱이’로 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인권운동가 목사가 “휘발유통을 들고 불에 뛰어드는 형국”이라고 말릴 정도였다. 공장이 미국으로 철수한 후 그는 기독노동자단체와 한국여성노동자회 활동에 힘썼다. 86년 부천서 성고문사건 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권인숙씨 석방에 기여했으며 87년 한국여성노동자회를 창립해 회장을 지냈다. 한국여성노동자회는 1989년 12월 실업급여 지급 촉구 운동을 펼쳤다. 정부가 고용보험제도를 도입하는 데 이 단체의 활동이 크게 기여한 것이다.

98년 구로여성인력개발센터 관장으로 취임한 후에는 실직 여성 가장들의 경제활동을 지원해왔다. 그는 “실직 여성들을 훈련시키고 취업을 알선해주는 일은 베테랑”이라며 웃었다. 고용률 70% 달성을 위한 정부의 시간제 일자리 정책에 마음이 쓰린 것도 여성일자리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여성 고용이 열악하고 반쪽짜리 일자리인데 더 쪼개자는 것은 기만입니다. 말이 좋아 시간선택제일 뿐이죠. 비정규직 여성들을 정규직으로 끌어올리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야죠. 예컨대 미국처럼 창업 붐을 일으킨다거나 특정 산업을 유치해서 지원해야 경쟁력이 있어요. 여성의 감성을 활용할 수 있는 디자인, 관광산업 등에 집중 투자하면 일자리가 생깁니다. 수치로 정책을 내세워선 제대로 될 수 없어요.”

cialis coupon free discount prescription coupons cialis trial coupon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