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어른과 함께 크는 존재” 공동육아부터 탈북 청소년 교육,
이주노동자 인권운동까지 30년간 공동체 살리기에 힘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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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수십 년 동안 해온 일로 상을 받는 게 쑥스럽습니다. 그동안 제가 해온 일이 그야말로 함께 하는 일이라 개인이 상을 받긴 적절하지 않지요. 공동육아에 상을 주셨으면 모두 기뻐했을걸 하는 생각도 잠시 했어요.”

여성신문사가 선정하는 ‘2014 올해의 교육인상’ 수상자인 정병호(59)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 공동대표는 “단체상으로 바꿔줄 수는 없느냐”며 환하게 웃었다. 현재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로 있는 정 대표는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을 통한 대안교육 운동뿐 아니라 탈북 청소년 교육사업에 헌신해온 공로로 ‘올해의 교육인상’을 받게 됐다. 시상식은 ‘2014 학부모가 뽑은 교육브랜드 대상’ 시상식과 겸해 27일 오전 11시 서울 삼성동 서울컨벤션 일루미나홀에서 열린다.

초긍정 마인드 지닌 교육실천가… 대학 졸업반 때 ‘어린이걱정모임’ 결성 

21일 오후 경기도 과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 대표는 부드럽고 섬세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를 가리켜 한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는 “인간미가 넘치는 초긍정 마인드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물질적 가치관, 주류의 가치관에서 초연한 교육운동가라는 평가다. 무엇보다 그는 수많은 아이들을 공동육아로 키워온 ‘아빠’이자 해송보육학교, 해송유아원, 해송아기둥지, 우리어린이집, 하나둘학교 등을 이 세상에 내보낸 교육 실천가다.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의 뿌리는 1978년 결성된 ‘어린이 걱정모임’이다. 유신 말기, 모든 게 첩첩히 막혀 있는 답답한 시절이다. 당시 그는 한국외국어대 4학년생이었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다 바깥에 나가 일하고 대여섯 살 아이가 동생을 밥 먹이는 상황이었어요. 큰아이들은 의무교육을 겉돌다가 노동 현장에 편입돼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일하다 손가락이 잘리기도 하고요. 야학을 하러 현장에 갔던 우리들은 빈부 격차가 너무 크고, 도시로 이주해온 사람들의 생활환경이 열악해서 충격을 받았지요.”

초등학교를 졸업해도 받침 있는 글자는 읽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는 교육을 통한 계급 재생산을 실감했다. 그래서 해송보육학교를 시작하게 됐다. 1978년 설립된 야간 해송보육학교는 유신시대에 젊은이들이 시도한 하나의 실험 야학이었다. 새로 만든 야학 교재의 등사 비용이라도 얻으려고 후원금을 모으러 간 자리에서 우연히 듣게 된 미국의 헤드스타트(Headstart) 운동 이야기는 눈이 번쩍 뜨이는 복음이었다. “경주말이 뛸 때는 말머리를 나란히 놓아야 해요. 가난한 집 아이들은 초등학교 가기 전에 이미 한참 뒤처져 있어서 취학 전에 이들을 교육시켜야만 비슷한 출발 선상에 설 수 있다는 거죠.”

이 일을 위해 야학 교과서 작업을 함께 한 대학생들과 유아교육학자, 대학원생들이 어린이걱정모임을 만들었다. 해송보육학교는 개교 1년 뒤에 2년 과정의 2기생들이 졸업한 1981년 말 문을 닫았다. 정 대표는 “마해송 선생의 이름을 따서 해송보육학교라고 정했다”며 “1회 졸업식 때 마해송 선생의 동화 ‘토끼와 원숭이’를 졸업생 연극으로 올린 기억이 난다. 일제강점기 암울하던 시절에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발견한 선구적인 교육운동의 흐름을 계승하려고 한 젊은이들의 움직임이었다”고 말했다.

1980년 여름 신림동 난곡의 철거민촌 맨 꼭대기 산등성이에 커다란 푸른 천막의 해송유아원이 섰다. 160명의 취학 전 아동을 8명의 해송보육학교 출신 교사들이 가르쳤다. 적은 자본으로, 많은 가난한 집 아이들을, 이른 시일 내에 있는 집 아이들과 나란히 출발점에 세우겠다는 새로운 시도였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터졌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씨가 해송유아원을 방문한 후 비슷한 모델로 새마을유아원 사업을 시작하면서, 시유지에 무허가로 지은 해송유아원은 바로 시립 새마을유아원으로 수용됐다. 해송유아원을 설립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교육 현장에서 밀려난 것이다.

공동육아의 터전, 해송아기둥지… ‘또 하나의 문화’를 만나다

해송유아원의 값비싼 실패를 겪은 후 1년 만에 재건된 어린이걱정모임은 창신동에 종일보육 형태의 생활교육을 추구하는 해송아기둥지를 만들게 된다. 낙산 성벽 밑의 무허가 주택 밀집 지역 안에 작은 마당이 있는 낡은 집을 전세로 얻었다. 마루의 높이를 약간 높게 해서 마루에서 미끄럼틀로 마당으로 내려올 수 있게 했고, 건축 때 버팀목으로 쓰이는 긴 나무와 폐타이어로 그네를 만들었다. 누구나 ‘최소의 비용으로 설립 가능한’ 공동육아의 터전을 만든 것이다. 해송아기둥지는 지금은 지역아동센터로 바뀌어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1대 해송아기둥지장을 지낸 그는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문화인류학 박사를 마치고 1991년 귀국한다. 미국에서 일본의 보육제도에 대한 학위논문을 쓰고 있던 1990년 초, 밖에서 걸어 잠근 방에서 일 나간 부모들을 기다리던 혜영이와 용철이가 불에 타 죽은 사건이 터졌다.

정 대표는 “그때 겪은 분노와 자책감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급속한 산업 팽창과 기혼 여성의 임금노동 증가로 도시 저소득층 지역의 공동체 연계망이 약해지고 어린아이들의 종일보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어요. 그런데도 5공 정부는 저소득층 맞벌이 부부의 종일육아를 담당하는 어린이집조차 오전‧오후반의 새마을 유아원으로 바꿔버렸지요. 유아교육의 복지 기능이란 한 다리가 처절하게 잘려나간 거죠.”

영유아보육법 제정을 앞두고 여성운동단체인 ‘또 하나의 문화’와 만난 그는 분야별 전문가가 망라된 ‘탁아제도와 미래의 어린이 양육을 걱정하는 모임’을 만들게 된다. 법이 제정되면서 계층 차별적 보육과 육아의 영리화가 근간을 이루는 보육법을 정부가 제정하려고 할 때, 더 이상 걱정만 하고 있을 수 없다는 뜻에서 걱정모임은 공동육아연구회로 이름을 바꾸고 구체적인 공동육아의 터전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한다. 공동육아연구회는 영유아보육법 제정 당시 보편적 보육제도를 강조했고, 소득에 따른 보육료 차등제를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공동육아연구회는 2001년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으로 이름을 바꿨다. 

“많은 학교와 유치원에서 부모들이 현관 문턱을 못 넘어오게 하잖아요. 이는 국가가 교육을 지역사회나 가족으로부터 떼어내는 근대적 학교교육 제도의 발상이죠. 교육의 민주화는 곧 부모 참여입니다. 근대교육 제도의 발상이 보육영역까지 투영되는 건 위험하죠. 이건 일상생활의 영역이니까요. 사실 탁아란 말도 일제 때 ‘아동보관소’에서 나온 말이죠. 아이들 맡겨놓고 일하러 나가는 다쿠지쇼(탁아소)에서 나왔어요. 일제가 패전한 다음 보호교육이라는 의미의 보육이라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그 말을 영유아보육법이 거의 그대로 베꼈죠. 우리는 남의 아이를 맡기거나 맡아다가 키워주는 탁아나 보육이 아니라 우리 아이를 함께 키우는 공동육아가 돼야 한다고 믿었어요.”

공동육아의 첫 실험적 터전으로 신촌지역 공동육아협동조합 길잡이 모임이 만들어졌다. 이후 공동체적 육아방식에 공감하는 30명이 300만원씩 출자금을 내 연남동 개인 주택을 개조해 우리어린이집을 개원했다. 그는 우리어린이집 초대 원장으로 일했다. 당시 그의 별명이 ‘괜찮아’였다. 별칭 부르기와 반말 하기는 공동육아의 특징이다.

그는 “워낙 처음 해보는 일을 하다보니 다들 걱정이 많았다”며 “내가 ‘이래도 괜찮다’ ‘저래도 괜찮다’고 입버릇처럼 괜찮다고 하니 ‘아, 또 괜찮아요?’ 그러더라. 그러다 별명이 ‘괜찮아 원장’이 됐다”며 파안대소했다. 무엇보다 아이는 기르거나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크는’ 존재라는 그의 말이 강하게 와 닿았다. 아직도 어른들은 무의식 중에 “아이를 기른다”고 말한다. 그 말에 대한 문제제기가 바로 공동육아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의 대안교육운동과 공동육아는 초기 발상부터 같다”고 말했다. “대안교육운동은 일종의 교육에 대한 대안을 생각해서 접근하는 것도 있지만, 내 아이의 육아부터 시작해 교육문제를 부딪치면서 해결하려는 부모들의 자발적이고 실천적인 모색 과정에서 나왔어요. 그래서 대부분의 대안학교에 가보면 공동육아를 해본 사람들이 설립한 경우가 많아요. 아이가 크니까 학교에 보냈다가 방과 후 공부방을 만들고, 학교교육으로는 안 되니까 대안학교를 만들게 된 거죠. 많은 대안교육 학교들이 협동조합 식으로 출자금을 모으고 부모 참여로 운영된 데서 공동육아가 출발점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공동육아 아이들에겐 ‘괜찮아 원장’, 탈북 청소년에겐 ‘일없어 원장’

그는 탈북 청소년들에게는 ‘일없어 교장’으로 통한다. ‘괜찮아 원장’이 ‘일없어 교장’으로 변모한 과정이 궁금했다. 2001년 북한이탈 주민 정착지원 시설인 하나원 안에 하나둘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맡았을 때 북에서 온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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