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베이징 세계여성회의… 유엔세계여성회의 행동강령 제정
국내 여성정책 토대 마련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세계적 공론화 계기
“봉사가 눈을 뜨듯 눈이 확 떠버린 계기가 됐다.”
1995년 9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베이징 세계여성회의’에 대해 한 여성계 인사는 이렇게 기억했다. 실제 베이징 세계여성회의는 우리나라 여성계 인사들에게 잊힐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제4차 베이징 세계여성회의는 앞서 멕시코 멕시코시티(1975), 덴마크 코펜하겐(1980), 케냐 나이로비(1985)에 이은 네 번째 세계여성회의였다. 당초 5년마다 열기로 했으나 유엔의 자금 사정으로 10년이 지나서야 베이징에서 열렸다. 그만큼 여성들의 목소리도 누적돼 있었다.
대회 슬로건은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였다. 당시 우리나라 여성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민주화운동의 하위 개념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다 보니 여성들의 문제는 사회적 의제로 다뤄지지 못한 채 늘 지역별·국가별로 끙끙 끌어안고만 있던 때였다. 한 여성 인사는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던 상태였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부족한 자신감의 기폭제가 베이징에서 터졌다. 본회의 3일 전부터 회의장 안팎은 벌써부터 열기로 가득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정부 대표, 유엔 기구, 민간단체 대표뿐만 아니라 여성, 아동, 그들의 가족들까지 3만6000명이 수천 개의 이슈를 내건 텐트를 대회장에 설치, 각종 워크숍과 문화행사를 열었다. 우리나라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환경분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여협) 등에서 텐트를 치고 한국의 여성문제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8월 30일부터 17일 동안 베이징 북쪽 도시 화이러우는 ‘하나의 작은 국가’였다고 당시 취재기자는 기억했다.(1995.9.15, 제341호)
본회의가 시작되면서 각국 참가자들은 오전 9시부터 경제, 정치참여, 인권, 평화와 안전, 교육, 건강, 환경 등 20여 개 분야에 대해 논의했다. 그외 여성에 대한 폭력, 지역별 행동, 여성네트워크, 신보수주의, 세대 간 대화 등 당시로서는 대부분의 주제들이 획기적이었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구타, 명예살인을 겪는 국가의 여성들이 세계 여성들과 네트워크를 갖고 느꼈을 문화적 충격은 상상이상이었을 것이다. 김정숙(68)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은 국회의원 시절에 대해 “당시 국감장에서 남성 의원들이 공공연히 성희롱 발언을 하곤 했다”고 말해 우리나라 여성문제가 갈 길이 멀었음을 보여줬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361개 유엔세계여성회의 행동강령이다.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유엔에 보고토록 해 각국은 이 행동강령을 여성정책의 토대로 쓸 수 있었다. 문민정부는 당시 이 회의 후 여성발전기본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세계 비정부기구(NGO)들이 가장 많이 부르짖은 ‘여성에 대한 모든 폭력을 거부한다.(No All Violence Woman)’란 구호와 더불어 일본군‘위안부’ 문제도 자연스럽게 주목을 받았다. 물론 정대협은 광복 50주년을 맞아 10년 만에 열리는 세계여성회의를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9월 1일부터는 징과 꽹과리를 들고 가두시위를, 2일 ‘여성법정: 여성에 대한 범죄 국제청문회’를 열어 위안부로 끌려갔던 정서운 할머니의 울음 섞인 증언을 들으며 참석자 모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1995.9.29, 제343호) 이로써 정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에 보다 강력하게 해결 방안을 요구할 수 있게 됐다.
이밖에 성희롱을 성폭력 범주에 포함시켜 유엔 문서에 정식 예시, 여성의 ‘성과 임신 출산에 대한 여성들의 건강결정권’ 관련 강령도 채택하는 등 지금도 여전히 여성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논의돼 강령에 채택됐다.
물론 한계도 있었다. 김영삼 정부는 그해 베이징 세계여성회의 후 세계화추진위원회를 통해 여성사회참여 10대 과제를 정하고, 국회에서는 여성발전기본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여성발전기본법은 남녀평등 촉진에는 기여했으나 차별의 구조적 해소, 여성정책의 기본법 역할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여성계의 비판을 들었다. 설익은 입법으로 허울만 좋게 만들어 놓은 것이란 비판이었다.
또 한국 참가단이 영부인인 손명순 여사를 대표단장으로 추대, 정부부처 대표단과 NGO 대표 등 600여 명으로 구성한 점도 초기 잡음이 많았다. 당시 여성계는 3당 합당으로 들어선 김영삼 정부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정부 주도의 대표단 구성에 반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운동의 파급력이나 언론 장악력을 위해 조율된 것으로 알려졌다.
주민자치중앙회 총재인 이연숙 전 정무장관은 “한국의 보수 여성단체와 진보 여성단체가 처음으로 함께 만나서 일을 해보았던 때”라며 “영부인까지 가니 더 많이 알려지지 않겠나 해서 같이 가게 됐고 결국 법 제정까지 이끌어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