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들을 위한 시나리오가 더 많아졌으면 한다.”(하지원)
“우리 나이에 대한민국에서 여배우로 산다는 것은 작품이 그리운 일”(조민수)
여배우들의 탄식이 이어지고 있다. “영화를 찍고 싶어도 찍을 작품이 없다”는 하소연이 충무로 안팎에서 들린다. 스크린 속 여배우 실종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남자 배우들이 대다수 상업영화의 중심을 장악하고 있는 한국 영화계에서 여배우는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까지 나온다. 한국 영화는 지난해 누적 영화 관객 수 2억 명을 돌파하며 1960년, 1990년대에 이어 ‘제3의 황금기’를 맞았지만 여배우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드라마는 여풍(女風), 영화는 남풍(男風)… 왜?
지난해 개봉한 183편의 한국 영화 중 최다 관객을 동원한 ‘7번방의 선물’(1281만776명)을 비롯해 관객 수 2~5위 영화인 ‘설국열차’ ‘관상’ ‘베를린’ ‘위대하게 은밀하게’ 등은 모두 남성 캐릭터가 중심이다. ‘공범’(주연 손예진·176만6283명)’ ‘더 파이브(김선아·70만5763명)’ ‘집으로 가는 길(전도연․185만1597명)’ 등 여성을 주요 인물로 내세운 영화는 성적이 저조하다. 특히 전도연의 2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으로 기대를 모았던 ‘집으로 가는 길’은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해 손익분기점(250만)에 도달하지 못해 고전 중이다.
지난해 공중파 3사 연기대상에서 여배우들이 대상(KBS 2TV ‘직장의신’ 김혜수․ MBC ‘기황후’ 하지원․ SBS ‘너의 목소리가 들려’ 이보영)을 휩쓸며 존재감을 드러낸 것과 대조적이다. 현재 브라운관은 여성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송이 신드롬을 일으키며 전국 시청률 2위를 달리고 있는 ‘별에서 온 그대’(전지현)나 ‘미스코리아’(이연희)는 여성 캐릭터를 극의 중심에 내세우고 있다.
이처럼 최근 영화와 드라마에서 여배우들의 입지가 다르게 나타나는 데 대해 전문가들은 주요 관객층이 영화와 드라마에 기대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변영주 영화감독은 한국 영화계에 여성 캐릭터들이 많지 않은 주된 이유로 “여배우가 중심이 되는 로맨틱코미디, 멜로 장르는 관객들이 드라마를 통해 충분히 즐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변 감독은 “이런 장르들이 과거에는 흥행 영화의 소재였다면 오히려 이젠 마이너가 됐다”며 “현재 관객들은 드라마에서 보지 못하는 영화를 경험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심영섭 영화평론가는 “드라마에선 여전히 로맨스나 판타지 장르를 선호하는 반면 최근 영화는 사회적으로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장르가 인기를 얻고 있다”며 “현재 영화의 주 관객층인 30~40대는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고, 남성 중심 장르인 스릴러, 액션 등 이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작품을 많이 본다”고 설명했다.
‘수상한 그녀’ ‘조선 미녀 삼총사’ 잇달아 개봉… 충무로 여배우 봄날 올까
지난해에 남성 중심의 영화가 주를 이뤘다면 올해는 여성 캐릭터의 활약을 기대해 볼 만하다. 장르와 소재도 액션, SF, 스릴러, 휴먼드라마 등 다양하다. ‘수상한 그녀’ ‘조선 미녀 삼총사’ ‘관능의 법칙’ ‘우아한 거짓말’ 등 여배우가 중심인 영화들이 올 상반기 잇달아 관객들과 만난다.
‘수상한 그녀’(1월 22일 개봉)는 욕쟁이 칠순 할머니(나문희)가 스무살 처녀(심은경)의 몸으로 돌아가면서 겪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50여 년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2인 1역 연기가 흥미롭다. 노인문제와 세대 간 갈등 소재를 휴먼 코미디 형식으로 담아냈다. 하지원, 강예원, 손가인 등 세 미녀가 조선 최고 현상금 사냥꾼으로 분하는 코믹 액션물 ‘조선 미녀 삼총사’는 오는 29일 개봉한다.
한국판 ‘섹스 앤 더 시티’로 불리는 ‘관능의 법칙’(2월 13일 개봉)은 일도, 사랑도, 섹스도 뜨겁게 즐기고 싶은 40대 세 친구들(엄정화, 문소리, 조민수)의 이야기를 담았다. 여성의 심리묘사에 능한 영화 ‘싱글즈’(2003)의 권칠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김려령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우아한 거짓말’은 딸을 잃은 슬픔을 딛고 살아가는 억척 엄마 ‘현숙’ 역에 김희애가, 동생의 죽음 뒤 진실을 찾으려는 언니 ‘만지’ 역에 설국열차의 헤로인 고아성이 맡아 올 상반기 관객들을 찾아간다.
심 평론가는 “작년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았기 때문에 올해는 좀 나아질 것”이라며 “여배우들이 충무로에서 입지를 넓힐 수 있는지는 올해 개봉하는 여성영화들의 흥행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변 감독은 “관객들의 취향은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면서도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 캐릭터를 보여주는 영화들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잘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