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을 하고도 마음이 편안하다면 이해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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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소영 / 여성신문 기자
  • 승인 2013.12.27 14:40
  • 수정 2014-01-16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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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은·김진관 사건’ 성폭력특별법 제정 계기 마련
검사의 심문 과정 과정 상세히 보도… “재판부도 성폭력의 가해자”

 

김보은․김진관 사건 공동대책위가 항소심을 앞두고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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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전 국민을 경악하게 한 ‘김보은·김진관 사건’. 당시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보은씨는 의붓아버지 김영오에게 12년간 성폭행을 당했다. 지방검찰청 수사관이던 김영오는 발설할 시 죽인다고 협박했다. 보은씨는 의붓아버지의 ‘성노리개’나 다름없었다. 성인이 돼서 남자친구가 생겼어도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보은씨는 남자친구 김진관씨와 함께 의붓아버지 김영오를 식칼로 찔러 죽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 사건은 당시 국민 여론을 들끓게 했다. 살해된 김영오의 반인륜적 행동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여성계는 물론 정치계와 종교계에서까지 대책위를 꾸릴 만큼 파장이 컸다. 진짜 피해자는 죽임을 당한 ‘의붓아버지’가 아닌 ‘김보은’씨라고 들고 일어섰다. 그 결과 살인사건 최초로 집행유예라는 판결이 내려졌고, 성폭력특별법 제정의 물꼬를 트는 계기를 마련했다. 

여성신문은 사건 발생 직후부터 17여 회에 걸쳐 관련 기사를 지면에 실었다. 공판장 스케치부터 김보은씨와 어머니 김영자씨, 공동변호인 배금자 변호사와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하는 등 거의 매호마다 집중적으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김보은’의 입장을 취재했다. 근친 강간 예방을 위해 한국성폭력상담소의 근친강간 사례를 일부 발췌해 싣기도 했다.(1992.6.12. 제178호 보도)

법원은 1심에서 자고 있던 김영오를 칼로 찌른 김진관씨에게 징역 7년을, 동행한 김보은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검찰 측은 두 피고인이 이 사건을 단순강도, 살인사건으로 위장하려 했다는 점을 내세웠다. 검사의 심문 과정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검사는 “학교 성적이 우수했던 것으로 아는데, 생활은 지극히 정상 아니었나?” “이제까지 잘 살아오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자 살인을 결심하고 방해물을 제거하려 했던 것은 아닌가?” 등 보은씨가 성폭행 피해자가 아니라 그런 생활을 즐기지 않았느냐는 식의 질문을 했다. 학생 측 대책위와 여성계 대책위는 공동대책위를 꾸리고 “재판부는 죽은 김영오와 같은 성폭력의 가해자”라며 무죄 석방을 주장했다.(1992.4.17. 제170호 보도) 

김보은과 김진관씨를 위해 22명의 변호사가 무료 변론에 나섰다. 재판의 쟁점은 여성계와 변호사의 주장대로 정당방위가 될 것이냐 여부에 모아졌다. 이들은 “현재의 성폭력과 미래의 성폭행을 보호하기 위한 정당방위”라고 피력했다.(1992.3.27. 제167호 보도) 

2심에서 김보은씨는 집행유예 3년, 김진관씨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한 점이 인정되지만 사적인 복수를 함으로써 법질서를 무너뜨렸다”고 이유를 밝혔다. 살인사건으로 집행유예를 받은 최초의 사건이지만 결국 정당방위는 인정되지 않았다. (1992.7.17. 제183호 보도)

여성신문은 항소심부터 본격적으로 김보은씨의 변론을 맡아 집행유예라는 판결을 받아낸 배금자 변호사와의 인터뷰도 진행했다. 배 변호사는 “보은씨는 어렸을 때부터 극도의 억압 상태와 공포 상태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은 자율성과 판단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워했다.(1992.9.25. 제192호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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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문은 이 사건과 관련해 친딸을 방관한 것이 아니냐며 뭇매를 맞았던 보은씨의 어머니와 신경정신과 박사와의 만남도 주선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엄마는 무엇을 했기에 그와 같은 상황이 지속됐느냐는 의문을 가졌다. 기성 언론에서 다루지 않았던 만큼 독자들의 궁금증을 해결하는 데 보탬이 됐다. 보은씨의 어머니는 “(의붓아버지의 친딸 성폭행 사실을 알고) 시어른들께도 호소하고 얘기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까 내가 왜 김영오한테 좀 더 완강히 거부를 못 했던가 후회스럽다”고 한탄했다. 당시 신경정신과 박사는 “보은씨의 어머니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졌다기보다는, 죽음에 직면한 사람이 가질법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고 진단했다. (1992.7.24. 제184호 보도)

여성신문은 집행유예로 풀려난 김보은씨와 전화 인터뷰를 통해 성폭력 상처로 피폐해진 그의 상태를 자세히 보도했다. 보은씨는 “진관이에 대한 죄책감에 앞서 눈물이 흐른다”고 착잡한 심정을 털어놨다. 이어 “의붓아버지 김영오에 대한 두려움과 무기력, 증오심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자살 시도도 몇 번이나 했었다”며 “풀려나자마자 진관이 부모님을 찾아뵙고 빌었다. 진관씨의 부친은 ‘네 잘못이 아니니 너무 괴로워 말고 앞으로 열심히 살라’고 다독여주셨다”고 전했다.(1992.10.23. 제196호 보도)

판결은 났지만 법과 제도에 대한 논란은 계속됐다. 그동안 성폭행범에 대한 처벌 법규가 있긴 했지만 형법과 폭력행위처벌에 관한 법률 등 법 운용이 나뉘어 있어 피해자 구조에 별 도움이 안 되고 있었다. 이에 성폭력특별법 제정에 대한 요구가 빗발쳤다. 성폭력 문제는 여성들의 문제뿐만 아니라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됐다. 여성신문은 성폭력특별법 제정추진특위(위원장 신혜수) 발족부터 특별법안을 만든 박송규 민자당 법사전문위원, 박상천 민주당 의원, 이종걸 변호사 등과 인터뷰를 했다.(1992.5.8. 제173호, 1992.7.17. 제183호 보도)  

특별기고 한기찬 변호사의 법률교실(1992.4.17. 제170호 보도)에서는 ‘성폭력사범문제, 어찌할 것인가’라는 제목 아래 김보은씨 사건을 통해 제기된 우리 사회의 성폭행 문제와 관련, “강간죄를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처벌할 수 있는 친고죄에서 피해자의 처벌을 바라지 않는 의사표시가 없는 한 처벌 가능한 반의사 불벌죄로 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1994년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됐다. 김보은씨의 비극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폭행 문제에 대한 관심과 경각심을 일깨운 것이다. 특별법은 친족 간 성폭행을 제3자가 고소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제2의 김보은’을 막고자 했다. 당시 아버지를 고소할 수 없었으나 존속도 고소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2012년 성폭력 상담 1321건 중 친족과 친·인척에 의한 성폭력이 229건(17.3%)을 차지했다. 특히 어린이와 유아는 각각 75건(52.1%), 30건(50.5%)으로 절반을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폭력특별법이 시행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딸들의 고통’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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