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집에서 솥뚜껑이나 운전해야지 뭐.

여자?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와이셔츠나 깨끗이 빨아놔야지 뭐.

여자?

자식 잘 키우고 시부모 잘 섬기고, 살림이나 잘하면 그만이지 뭐.

여자?

이름도 몰라, 성도 몰라.

그냥 아무개 엄마로만 남는거지 뭐.

과연, 위와 같은 시절이 있었을까?

정답은, “네, 있었습니다.”

그것도 불과 몇년전, 아니 9년전만 해도 그런 사회통념이 보편화되

어 있었다.

핸드백에 커피 부어 마시면 이상하지만 커피잔에 커피 담아 마시면

당연하게 생각한다.

‘여자’에 대한 위의 감정도 커피잔에 커피 담아 마시듯 아주 당연

한 거였다.남자들 뿐 아니라 여자들조차도.

그래서 태어난 게 '여성신문'.

그래서 태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게 '여성신문'.

'여성신문'은 때로는 소프라노로 대남성 자기주장을 높이 부르짖

기도 하고, 때로는 허스키한 알토로 대여성 자기개발을 나즈막이 촉

구하기도 하고, 그렇게 '여성신문'은 9년을 ‘살아’왔다.

‘살아’왔다는 것은 정말 눈부신 생명력을 일컫는다.

고비고비, 쓰러지고 넘어질뻔했던 벼랑에서, 다시 추스리고, 우뚝 솟

아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땅의 2천만 여성들로부터 뿜어져나오는 기

(氣), 氣의 ‘총체적 총기’때문.

이계경사장 특유의 ‘익사직전까지 헤엄쳐 올라가는 장렬한 수영

법’에서 그 생명의 뿌리는 비롯된다.

그리고 전국각지에서 모여든 똘망똘망한 여성들이 추스려 만든 숱한

희생의 모자이크.

그것이 오늘 9년생 '여성신문'이 ‘살아’ 있을 수 있음의 ‘힘’

이다.

그렇다.

'여성신문'이 대견스러운 건 밖에서 누가 밥을 떠먹여 주지도 않

았고, 밖에서 누가 어깨를 다독거려 주지도 않았건만, 안에서 제 열

정으로, 제 氣를 어쩌지 못하고, 뿜어져 나오고, 솟아오르고, 영글

어, 오늘의 키로 자라난 것.

이제 아홉살배기, 그것도 똘똘한 아홉살배기이기에 ‘뭐든지’ 할

수 있다.

파릇파릇한 가능성의 나이가 아닌가!

마라토너가 되기 위해 불철주야 달음박질을 할 수도 있고, 내일을

꿈꾸며 무대에 올라 혼자 춤을 출 수도 있다.

장대높이 선수처럼 기록에 도전하여 훌쩍 뛰어넘을 수도 있고, 세

상의 모든 불의에 대항하여 ‘바로서기’ 선발대회를 개최할 수도

있다.

그렇게 올록볼록한 나이, 아홉살.

좋은 세상 만나면 반갑다, 포옹해주며 올록.

나쁜 세상 만나면 화난다, 불끈쥐며 볼록.

그런데 '여성신문'은 과연 아홉살배기의 ‘제대로 된 올록볼록

함’을 생명인자로 하고 있는지...

이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건강진단을 해 볼 필요가 있다.

간, 위, 장...등 몸안의 오장육부 주요부위를 두루 비춰보고, 살펴보는

종합건강진단.

아홉살 생일을 맞아 폭죽을 터뜨리는 기쁨과 동시에 지혜로운 자기

검증을 해보자.

아홉살배기가 너무 어려 아직도 하기스를 차고 있지는 않는가?

그런 검증이 끝나면 많은 사람들은 느낄 것이다.

'여성신문'이 청정한 눈빛과 똘똘한 생명력, 아직은 ‘덜’ 여물어

서 그만큼 ‘더’ 열렬히 보이는 그 모든 것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

실.

그래서 '여성신문'을 챙겨 읽는 독자들 역시 뭔가 달라보인다.

티파니 보석상옆에서 기웃기웃거리는 유욕주의자가 아니라, 삶의 야

산, 그 등선에서 야트막하게 포복할 줄 아는 무욕주의자들.

'여성신문' 곁에 그들이 함께 하는 한, 하루세끼 배불리 먹진 못

해도 '여성신문'은 1백세, 2백세, 3백세까지 장수할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장수의 비결은 ‘소식(小食)’이니까!

...'여성신문' 화이팅!

' 현대방송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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