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적 사고 통한 기업 혁신 강조한 ‘아웃런’ 출간…
‘아이디어 제너레이션’ 강의로 최고 교수상 받기도

“애플은 세계 최고 기업이라기보다 배울 점이
많은 기업… 그들의 진화 과정에서 교훈 얻어야”

이 세상에 백 프로 새로운 것은 없다. 영원한 승자도 없는 반면 영원한 패자도 없다. 아니, 오히려 독점적 위치에 있는 승자일수록 판단 착오를 하는 순간 일시에 패자로, 역사의 한 장에서 사라질 수 있는 위험한 처지에 빠질 수 있다. 마이너 그룹들에 희망을 주는 가설이다. 이를 구체적이고 핵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혁신’이 만들어질 수 있는 ‘공간’을 역설하는 학자가 있다.

올 한 해 안식년을 서울대 경영대에 초빙돼 숱한 강단과 강연장을 오가는 한편 새로운 개념의 대중적 경영서 ‘아웃런’(Outrun·한국경제신문)을 출간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에린 조(사진) 뉴욕 파슨스대 종신교수(전략디자인 경영학과)가 그 주인공이다. 그의 책은 경험과 상식을 뒤집음으로써 ‘혁신’을 ‘디자인’할 수 있다는 실례를 세계 유수 기업들의 시행착오를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 기저엔 이젠 나무 하나하나에 집착하기보다 그 나무들이 모여 이루는 숲의 거대한 청사진을 가늠할 수 있는 통찰력과 융합적 사고가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절박감이 배어 있다. 그 궁극적 목적지는 어디일까. 흔히 예상하듯이 세계 무대에서 우위를 점할 경쟁력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 모두가 다 잘 사는 길”이란, 경제적 관점에서 거의 불가능한 이상론이 그가 제시하는 정확한 정답이다. 그런데, 그와 얘기를 나누다보니 지금 세계경제는 그 방향으로 몸을 틀어 관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기술력과 디자인만으론 2% 부족

전체 방향성 제시할 수 있어야 성공

에린 조 교수는 서울대에서 의류학 전공으로 석사 과정까지 마친 후 도미, 위스콘신대에서 글로벌 유통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8년부터 워싱턴주립대, 위스콘신대, 컬럼비아대 등의 명문대 강단에 섰다. ‘아이디어 제너레이션’(Idea Generation) 등을 주제로 한 명강의로 세계 최고 디자인학교인 파슨스대에서 최고 교수상(Lifetime Award)를 받기도 했다.

 -책을 통해 디자인, 경영, 그리고 혁신이라는 융합 공간을 설명하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소비자 선택에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기업들이 1980년대엔 디자이너들에게 경영 마인드를 심어줘서 그들이 경영에 적극 참여하게 하자는 경향이었다면,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는 디자인 자체를 바꿈으로써 기존 소비 행위와는 다른 공간을 만들어내자는 추세다. 가령, 다이슨의 날개 없는 선풍기의 경우, 위험 걱정을 더는 안전성에 날개가 빠지는 대신 생긴 풍향의 방향성 때문에 에어컨 대체 역할까지 가능하게 하는 디자인 전략으로 성공했다.

요즘엔 이처럼 무엇인가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내는 데는 독특한 과정이 우선돼야 한다는 생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창조할 때 들어가는 과정을 경영인들의 마인드와 공간에 집어넣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경우, 디자이너가 아닌 창조자의 전략 마인드를 가진 전략가다. 다시 말하면 디자인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닌, 디자인팀의 방향성을 제시한 사람이다. 이는 마치 없던 공간을 새로 창조하고 거기에 숲과 오아시스를 만들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책을 통해 기술과 디자인에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 진정한 혁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첨단기술이나 디자인, 창의성 등의 요소는 이제 부차적 요소란 의미인가.

“기술과 디자인 능력, 그리고 기본적 아이디어는 이젠 전 세계가 비슷한 수준으로 가고 있어 경쟁력을 가르는 핵심 기준이 되기엔 부족하다. 오히려 이것들이 뭉쳐져 어떤 쪽으로 향해 나가느냐를 결정하는 마인드가 바로 차이를 만들 것이다. 이때는 (미시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위에서 한번 틀어 의미 있는 방향으로 가게 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방법은 대략 두 가지로 나뉜다. 위에서 전체적으로 내려다보면서 무엇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 크게 가늠하는, 즉 ‘숲’을 보는 방법이 있고, 나무 하나하나를 보면서 숲을 만드는 방법이 있다. 아무래도 국내 기업의 전략은 후자에 더 초점을 맞추는 듯한데, 좀 더 거시적 안목이 필요하다고 본다. 널찍한 길을 닦아놓고 자동차를 가게 해야지, 길도 닦지 않은 채 자동차만 무조건 보낼 수는 없지 않는가. 특히 생각을 돌리고 또 돌리는, 짜고 또 짜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생각을 짜내는 것도 같은 방향에서 자꾸 짜내면 효율성이 떨어진다. 이 방향으로 짜봤으면 저 방향으로 짜본다든지, 다른 관점에서 생각을 자꾸 돌려야 한다. 내가 편안한 이 공간에서 나와 밖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그 수고가 의미 있다. 그래서 ‘경계’를 뛰어넘는 사고 습관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전략의 방향성, 그 밑바탕이 되는 통찰력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 선두의 기업도 언제든지 고꾸라질 수 있다는 가정이 성립할 수 있겠다.

“선두 기업을 뒤따라오는 후발 기업이 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추격하는 경우는 많다. 휴대폰 업계에서 최고를 점하던 노키아가 몰락한 것을 봐라. 애플이 휴대폰 시장에 도전했을 때 노키아는 기술·디자인 면에서 탁월한 수준으로 최고의 수익을 내고 있었지만, 이것들을 통합해 전략적 방향으로 선회하지 못해 실패했다. 소니가 취약해진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자면, 소니는 워크맨 시장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줄 착각했다. 그래서 휴대폰 시장을 간과하고 위크맨의 기능 혁신에만 집착한 결과 수개월을 헛발질로 소모했다. 그 수개월이 지금의 차이를 만든 것이다.

1888년 창립돼 사진 혁명을 주도했던 코닥은 또 어떤가. 1976년 필름 시장에서 90%, 카메라 시장에서 85%의 놀라운 점유율을 기록했던 기업이 지난해 1월 맨해튼 법정에 파산 신청을 했다. 디지털 시장에 제대로 적응 못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원인이지만, 놀랍게도 코닥은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발명해낸 기업이다. 그것도 소니보다 6년이나 빠른 1976년에!

문제는 코닥이 경쟁자들보다 훨씬 소극적으로 그 혁신 과정을 진행시킨 점이다. 코닥은 소비자가 미래에도 여전히 전통 방식으로 사진을 찍고 현상할 것이라는 잘못된 가정을 확신했고, 스스로 만들어낸 디지털 카메라라는 혁신이 자신들의 소중한 필름 시장을 잠식할까봐 지레 두려워했던 것이다. 부랴부랴 1990년이 돼서야 디지털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이미 급속도로 몰락은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기업의 ‘혁신’이란 것은 미래의 상황을 그려내는 것이고, 그 미래라는 것은 과거 현상의 반복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당신이 강조하고 있는 ‘공간’의 개념, 좀 어렵다.

“쉽게 말해 아이폰이 나오기 전에 ‘아이폰’이란 공간은 애플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휴대폰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기업은 어디에도 없었다. 휴대폰의 경우, 내가 어디에 가 있든 언제나 전화를 받을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기에 휴지할 수 있도록 작고 가벼운 것이 경쟁력이며 또 잘 터져야 했다. 기업들이 여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아이폰은 굉장히 크고 무겁다. 심지어 통화 중에도 뚝뚝 잘 끊어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2000년대 초부터 스티브 잡스가 우리 라이프스타일의 방향성을 가늠하고 이를 선제적으로 제시했다는 사실이다. 집 또는 사무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전화통화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근거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놓고 방향성을 정해놓았기에 지금의 앱 시장이 가능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플의 실례를 많이 든 것은 애플이 세계 최고의 기업이라서가 아니라 배울 점이 많은 기업이라는 맥락에서다.”

-우리의 기업 현실은 어떤가. 주장하는 맥락에서 어느 정도 경쟁력이 있다고 보는가.

“최근 세계적 경영컨설팅 업체인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발표한 혁신기업 순위에서 20위 안에 든 한국 기업은 삼성과 현대 정도다. 이는 포브스의 세계 100대 혁신기업 선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중국과 일본만 해도 5~10여 개 기업이 순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 말이다. 디자이너와 MBA 출신이 월등히 많은 훌륭한 인재풀에 글로벌 마켓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수많은 해외 브랜드가 한국의 기술로 구축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의아스럽다. 더구나 국내 손꼽히는 기업들이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불안하다. 후발 주자가 같은 기능에 더 낮은 가격을 제시할 경우 그 경쟁 우위는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한국의 급속한 성장을 이끈 과거 성장 전략의 부정적 결과일 수도 있다. 우리 기업들은 그동안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ODM(제조자개발생산)의 중간 생산자 역할을 충실히 해왔고, 기존 산업군을 신속히 벤치마킹하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을 중점적으로 써왔다. 그러나 이 같은 기술 중심의 혁신은 소비자가 브랜드마다 성능이 어떻게 다른지 구별할 수 없는 상황에선 경쟁력을 갖기 힘들다. 다행히 삼성, 엘지 등 선도 기업들이 위기에 잘 대처하고 있다고 본다. 삼성의 경우, 애플에 대적하는 길을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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