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스톡홀름 등에서 활발한 활동… 전시회 통해 마약 중독 청소년, 탈북자, 불법체류자 등 지원
“작가가 평생 무엇을 끌고 나가느냐, 이념이 중요해… 예술엔 내 삶의 진실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어”

 

최근 전시회에 선보인 자연의 소리 대작을 배경으로 앉은 한정희 화백.cialis coupon cialis coupon cialis coupon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sumatriptan patch http://sumatriptannow.com/patch sumatriptan patchwhat is the generic for bystolic bystolic coupon 2013 bystolic coupon 2013
최근 전시회에 선보인 '자연의 소리' 대작을 배경으로 앉은 한정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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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자신의 그림이 번듯한 미술관에 걸리기보다는 세상 구석구석 어려운 이들을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을 ‘작가’로서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는 화가가 있다면 그의 예술가적 정체성에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눠보니 그의 이런 생각은 스스로의 예술관에 근거한 것이고, 그래서 그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곧 나눈다는 의미와 맞닿아 있는 실천적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 맨해튼과 스웨덴 스톡홀름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 중견화가 한정희(60)씨는 1978년 스톡홀름에서 첫 개인전을 연 이후 40여 회의 개인전을 포함해 한국, 프랑스, 대만 등 세계 각지에서 열리고 있는 100여 회 이상의 전시회를 통해 출품작을 소외된 이웃을 돕는 데 제공해왔다. 그는 예술 활동과 나눔의 삶을 늘 일관되게, 규칙적으로 병행하는 가운데 자신의 작품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입양아, 탈북자와 불법체류자 자녀, 마약중독 청소년 등을 보듬고 있다. 최근 서울 한벽원 미술관에서 수년간 천착해온 ‘자연의 소리(Voice of Nature)’를 주제로 한 전시회를 마무리하고 출국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그를 만나 얘기를 나누었다.

부친 한봉덕 화백에게 큰 영향 받아

여고생으로 첫 전시회 열어 주목

“그림은 누구나 다 그릴 수 있는 것, 그림 그리는 작업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화가로 등단한 이후 35년을 한결같이, 중단 없이, 오로지 작품만을 붙들고 한길을 걸어온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분 날 때마다 그림을 그리거나 다른 일과 병행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을 규칙적으로 작업에 투자해왔기에, 이것이 화가에겐 소위 탤런트(talent)보다 더 중요한 요소라고 여기죠.”

그의 예술 인생은 실제론 아버지의 아틀리에에서 놀이하듯 그림을 그리며 뒹굴던 네 살 때부터 시작됐다. 1997년 타계한 그의 아버지는 한국 현대미술운동의 기수 역할을 한 한봉덕 화백이다. 한 화백은 1950년대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로 재직하던 중 ‘국전폐지론’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는가 하면, 현대미술연구소를 설립해 ‘현대작가 초대전’을 개최했다. 이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유화 속에 동양화적 수묵기법을 도입, 유럽 화단에서 주목받았다. 평소 아버지로부터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그러니, 재료는 꼭 최고의 것으로 쓰고, 무엇보다 열심히, 성실히 정진하라”는 조언을 들었던 그는 이화여고 2학년 때인 1970년 이화여고·조선일보 공모전에 당선돼 신문갤러리에서 ‘4인전’을 가졌다. 당시 여고생으로선 최초의 전시회라 많은 관심을 모았다.

“여기서 대학원을 졸업한 후 부모님이 계신 스웨덴으로 유학 가 1978년 스톡홀름에서 첫 개인전을 연 게 화가로서 정식 데뷔한 셈이죠. 거기서 내 예술 인생의 큰 전환기를 맞았습니다. 여기선 그림 그리는 사람들을 ‘환쟁이’라고도 하죠. 그만큼 손의 테크닉을 중요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서양에선 화가의 이념이 극히 중요한 것을 보면서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작가가 평생 작업하면서 무엇을 끌고 나가느냐가 너무나 중요한 문제죠. 그렇다보니 그림을 계속 그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워지고, 동시에 딜레마에 빠졌죠. 그래서 먼저 든 생각이 과연 ‘예술’이란 무엇인지 본질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스톡홀름에서 서양미술사학과 대학원 과정을 밟게 됐죠. 스웨덴어 공부와 병행하며 10년 만에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내 작업에 의문이 들 때마다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계속 미술 관련 대학원 과정을 밟았습니다. 오죽하면 10년 전 50세가 됐을 때 남편에게 선물로 대학원을 보내달라고 했을 정도니까요(웃음). 어떤 이들은 ‘프로 작가인데 왜 계속 공부하느냐’며 의문스러워도 하죠.”

그는 컴퓨터 엔지니어 출신의 남편이 미국 지사에 발령 받은 것을 계기로 1990년대 말부터 뉴욕 근교 롱아일랜드에 거주하며 작업을 해오고 있다. 미국 생활 초기 화단에서 받은 충격이 상당했는데,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작품관이 좀 더 명확해졌다고 한다.

“뉴욕 첼시 화랑가에 걸린 작품들은 인간성이 너무 메말라 있는 데다가 대부분의 작품에 욕설이 난무했어요. 뭐든지 때려 부순다는 식의 폭력성에 성폭행을 소재로 해 남녀의 성기가 노골적으로, 그로테스크하게 표현된 그림이 주류였어요. 너무 쇼크를 받아 그림도 못 그리겠고, 슬럼프도 왔죠. 평온한 소재에 아름다운 그림들은 세상과 영합하는 나이브(naive)한 장식용 그림 정도로 치부됐고 평가도 낮게 받았어요. 후에 공부를 하면서 그런 그림을 그리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성장기에 가정 내 성폭력을 당했거나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40년 가까이 작품 활동을 하면서 절감한 것은 절대 예술은 거짓말을 하거나 속이지 않는다는 것, 내 삶의 진실한 반영이란 사실이었습니다.”

 

마약중독 청소년 위해 흑백 그림만 그리다 건강 해치기도

이후 그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해 표현하고, 절대적으로 긍정적 세계관을 화폭을 통해 반영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나 LA로 이주한 후 ‘나눔선교회’란 단체를 우연히 알게 돼 거기서 마약과 약물에 찌든 동포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다시 한 번 격심한 혼란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는 마약 하는 아이들과 작품을 통해 소통하고 싶어 이전의 따뜻하고 화려한 색채를 버리고 음울한 흑백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약에 중독된 아이들은 매일매일의 세계가 죽느냐, 사느냐 할 정도로 힘겨워 허덕이는데 밝고 아름다운 색상에 이들이 과연 공감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이 작업은 무려 10년을 훌쩍 넘겨 진행됐고, 그 자신의 건강을 좀먹어 들어갔다. 

“천장과 바닥이 수시로 빙빙 돌곤 하는 원인 모를 병으로 고통 받았어요. 어느 날, 집에 수리를 하러 온 사람이 집 안에 걸린 내 그림들을 보면서 울먹이며 말하더군요. ‘선생님, 더 이상 이런 그림을 그리면 안 돼요. 오래 못 사세요’라고. 예술을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너무 아픔이 느껴지는 그런 그림들이었나 봐요.”

그가 이 심연에서 헤어나온 것은 불과 5~6년 전이라고 한다.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그리스 산토리니를 남편과 함께 여행하면서 “새파란 하늘과 물, 거기에 어우러진 새하얀 벽에 부켄빌리아 등 갖가지 눈부신 꽃들이 무리지어 피어 있는 것을 보면서” 이전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원색적 미를 재발견했다. 무엇보다 그런 눈부신 풍경에서 신의 존재를 체감했다. 그 후 그 느낌을 작품에 쏟아부으려 분투했고 8개월 동안 겨우 작품 한 점을 마무리했다. 어느 새 그를 괴롭혀왔던 어지럼증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림 하나를 완성해가면서 누가 뭐래도 작가로서 내 갈 길은 이거다, 결론을 내렸습니다. 얼핏 보면 화려한 꽃 그림 같지만 그 꽃 한 송이 한 송이에 그림자가 스며들어 있고, 심지어 시들어가는 꽃도 눈에 띕니다. 어떻게 보면 내 과거의 모습이고,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그걸 시인하고 그래서 나 스스로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깨달음을 표출하고 싶었습니다. 자기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수많은 아픔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작가의 성향 때문인지 미술비평가 탈리아 브라호플러스는 그의 작품을 두고 “평면이든 오브제를 활용한 설치작품이든 표면적 형상 이면에 담긴 보이지 않는 기운으로서의 영적 세계를 표현했다”고 평한다. 뉴욕에서 활동 중인 원로 화가 최일단씨는 “한정희의 작품은 동양화 기법을 도입한 것이 매우 특이하다”며 동서양을 관통해 아우르는 능력을 높이 산 바 있다. 그 자신의 주요 관심사도 자신의 작품 안에 동서양의 융합을 시도하면서 누가 봐도 동양인의 작품이란 정체성을 뚜렷이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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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희 화백

“삶의 힘 공감할 수 있는 작품으로 승부하고 싶다”

가족들과의 조화로운 화합 역시 그의 작품 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는 첫 결혼 실패 후 8살 연하의 스웨덴 남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 첫아이인 아들은 의학을 전공하다가 생태학으로 진로를 급변경했다. 아프리카 등 열악한 지역에서 아이들이 교통사고를 당해도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피를 구하지 못해 속절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좀 더 근본적인 치유책을 발견하고 싶어서다. 아들은 현재 미 국방부에서 인공 혈액을 만드는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아들보다는 딸 바보다. 고교 시절 너무 모범생이어서 극심한 왕따를 당했던 딸은 그 고통을 남을 돕는 일을 통해 극복했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잘, 그리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자원봉사라고 서슴없이 말한다고 한다. 딸은 뉴욕대(NYU) 대학원에서 리더십과 사회정의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틈틈이 유엔여성(UN Women)을 비롯한 다양한 유엔 기관에서 인턴으로 일하면서 분쟁 지역과 최빈국을 수시로 찾아가 전쟁미망인과 고아, 빈곤 아동을 돕고 있다.

“맨해튼 코리아타운에 가면 벤치에 노숙자들이 가득한데, 딸은 어쩌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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