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계약서 없고 야근·밤샘은 밥 먹듯
월 80만원 받으며 ‘열정노동’ 강요당해

 

문화예술인들의 취업과 창업을 위한 박람회 현장.abortion pill abortion pill abortion pill
문화예술인들의 취업과 창업을 위한 박람회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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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한류를 이끄는 문화 콘텐츠 분야는 청년층에게 매력적인 직업이다. 그러나 대다수 종사자들은 턱없이 낮은 임금을 받고 야근과 밤샘 근무를 강요받고 있다. 특히 여성들은 현장에서 남성성을 강요받거나 성차별을 겪기도 하고,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어려운 구조 탓에 심각한 경력단절을 경험한다.

2011년부터 1년 반가량 방송작가로 일한 이모(26)씨는 방송작가가 꿈이라는 대학 후배에게 “방송작가 할 생각하지 말라고 권했다”며 씁쓸해했다. 그도 2년 전까지는 다큐멘터리 작가를 꿈꾸며 외주제작사에서 서브작가를 시작했다. 근로계약서는 아예 쓰지 않았다. 그가 맡은 업무는 자료조사, 섭외, 협찬, 프리뷰(촬영 테이프를 타임코드와 함께 상세히 적는 일)였다. 이씨는 “일주일에 이틀은 수십 개의 촬영 테이프 프리뷰를 하느라 밤을 새우고, 나머지는 자료조사와 섭외, 협찬 업무를 하느라 햇빛을 보기 어려웠다”고 했다.

1년만 버티면 메인 작가로 ‘입봉’을 시켜주겠다는 제작사 대표의 파격적 약속에 월 80만원의 박봉에도 버텼지만 그는 결국 6개월 만에 손을 들고 나왔다. “몸이 버텨내질 못해서”였다. 그 뒤 운 좋게 인맥으로 방송사 소속 작가로 입사했지만 프로듀서(PD)와의 마찰은 그를 더 힘들게 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여자라서 그래”라는 말을 들었고, “왜 그렇게 남자 같냐”는 성희롱적 발언도 여러 번 들었다. “방송사 소속이라고 해도 근로계약서 한 장 없이 야근을 밥 먹듯 해야 하고, PD 눈치 보느라 불합리한 일에도 항의하지 못하는 상황에 답답했어요. 아무리 원고를 열심히 쓴다 해도 누가 작가를 알아줘요. 작가는 엔딩 크레디트에만 존재하잖아요.”

방송작가 중에도 근로계약서를 쓰는 경우가 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작가들은 집필계약서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대다수 작가들은 계약서를 쓰지 않는 프로젝트형 프리랜서다. 이 때문에 고용 기간과 형태가 아주 불안정하다. 현재 한국방송작가협회에 등록된 작가는 2000여 명으로 과반이 여성 작가다. 특히 방송작가협회 가입 대상이 아닌 경력 5년 차 미만 작가들은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오늘도 사무실 구석에서 ‘막내’ ‘새끼작가’로 불리며 밤샘 작업을 강요받고 있다. 제작사와 방송사는 작가 스스로 원해서 시작한 일이기에 불합리한 근로조건도 감수해야 한다고 ‘열정 노동’을 강요한다.

지난 11일 서울 불광동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열린 ‘문화콘텐츠 여성인력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토론회’에 참석한 양희 EBS 방송작가협회장은 “언제까지 방송 제작 참여라는 기대와 기쁨만으로 고용 불합리를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방송작가의 전문성 확보를 위해 고용 안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양 회장은 “후배 작가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빨리 다른 직업을 찾아보라는 것”이라며 “현재 후배들이 받는 임금이 내가 처음 일을 시작한 20년 전과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처우가 열악하고, 오래 일했다고 해서 고용이 안정된 것도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영화계에서 표준근로계약서를 만든 것처럼 방송사들도 작가를 위한 근로계약서를 도입하고, 고용보험 가입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소영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융합연구실장은 “문화 콘텐츠 분야는 여성들에게 유리한 분야로 알려져 있다. 관련 학과에 진입하는 여성들이 늘어난 데다 취업률도 높지만 분야에 따라 직무 차이에 따른 성별격차와 경력단절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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