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살까지 계속 한복 지을 거예요”

한복 디자이너 하면 으레 대중에게 먼저 떠오르는 이름 ‘박술녀’(57·사진). 강남 청담동 사옥에서 만난 그는 마술을 부리는 듯했다. 핫핑크 빛 화려한 티셔츠에 검은 가죽 재킷, 정열적인 자주색 스커트에 블랙 레깅스 차림의 강렬하고 생기발랄한 모습이었다가, 여기에 조각 무늬를 덧댄 한복 풍의 베스트를 걸치자 금세 한복 짓는 사람다워지는 것 아닌가. 그는 지금의 옷차림이 사진 촬영 의상으로 적합한지를 물으며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야”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한복 짓기를 업으로 삼아 매진해온 29년, 그의 인생 얘기를 듣노라면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면 결코 감당해내지 못했을 여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 이리자 선생에게서 몸가짐과 강인함 배워

이영희, 이리자, 박선영, 황신엽 등 한복 디자이너 1세대를 이은 선두주자로 꼽히는 그의 한복 인생은 어릴 적부터 이미 무의식중에 예정돼 있었다. 여기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7남매를 키우는 한편 생계를 위해 생선을 이고 다니면서 장사를 했던 어머니지만 친척 결혼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반드시 집에 돌아와 허름한 일바지를 급히 벗어놓고 재빨리 한복으로 갈아입고 외출하곤 했다.

셋째 딸인 그는 어머니의 이런 모습을 눈여겨보면서 어린 마음에도 ‘엄마의 저 큰 가슴을 어떻게 잘 조여 매면 저 부분을 좀 더 날씬하게, 그래서 한복 전체를 맵시 나게 만들 수 있을까’ 고심했다고 한다. 이런 생각이 확장돼 장차 커서는 꼭 한복을 만들겠다는 집착으로 변했다. 충남 서천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에서 20대 초반까지 방직 공장을 다녔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여러 학원을 전전하다 이리자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기를 수차례 청한 끝에 선생의 제자가 돼 견습 기간을 거쳤다. 이 모든 과정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평소 어머니가 늘 하던 “(꿈을 이루기 위해)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무엇보다 (생계를 위해) 꼭 기술을 익히도록 해라”는 당부 덕분이었다.

“서울에 올라오기 전 다녔던 방직 공장에서의 경험도 다 한복 짓는 데 유용한 공부였어요. 경사·위사·관사 등 실의 원리를 체험했고, 옷감에 대한 사랑을 몸으로 배웠죠. 7년 전 갑상선암으로 수술할 때도 아이들 걱정부터 앞서야 할 텐데, 난 모아놓은 수많은 원단을 보면서 울었어요. 저 소중한 것들을 다 멋진 한복으로 지어 세상에 내놓고 죽어야 할 텐데 하면서 말이죠.(웃음) 옷감들이 말이죠, 애착을 안 두면 한낱 천 조각에 불과하지 않겠어요?”

그의 사옥 1층부터 3층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원단은 그의 또 다른 자부심이다. 방직 공장의 경험이 있기에 자신이 원하는 원단 종류와 양을 직접 주문해 제작하기도 했고, 지금은 구하기 힘든 원사로 짠 원단도 수두룩하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한복의 기준은 명확하다. “겉감뿐 아니라 안감도 좋아야 하기에 지금도 좋은 안감을 구하러 시장을 누비고 다닌다”며 “입는 사람이 행복해야 한복으로서 의미가 있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그냥 형태만 한복이어선 안 되죠. 옷의 이음과 이음 사이가 울지 않아야 입은 사람의 격이 높아지는 법이어서 옛 말씀에 굵은 것을 가늘고 곱게 보이게 하는 것은 바로 바느질 솜씨라고 했잖아요? 박음 선이 울면 그만큼 그 사람의 품위가 떨어지게 마련이죠. 박음 선을 정성스레 편편하게 잘 다려야 우아한 한복이 됩니다.”

평생 워커홀릭 “두 살배기 딸이 응급실에 누워있을 때도, 엄마 팔순잔치에도 못 가봐”

그는 자신의 스승인 이리자 선생을 비롯해 1세대 디자이너들에 대해 “한복의 위상을 높였다”는 점을 가장 크게 평가한다. 이 ‘위상’ 이면엔 디자이너로서의 꼼꼼하고 대찬 자부심이 숨어 있다.

“이리자 선생님은 아주 멋쟁이셨어요. 아침 8시만 되면 완벽하게 화장한 얼굴, 헤어 디자이너가 매만져준 머리에 성장을 하고 문하생들 앞에 나타나시곤 했어요. 작업실을 그런 모습으로 한 바퀴 도시면서 무언 중에 제자들에게 디자이너로서의 멋진 관리를 가르쳐주신 거죠. 그래서 나도 후에 디자이너로 독립하면 내 손님들에게 늘 예쁘고 깔끔한 모습을 보여줘야 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선생님에게 배운 또 하나의 가르침은 바로 강인함입니다. 선생님은 어떤 일에도 절대 칭찬을 안 하셨어요. 대신 제자들이 만들던 옷에 얼룩 하나라도 눈에 띄면 ‘이건 도둑질한 것보다 더 나쁜 짓’이라며 ‘내 얼굴에 침을 뱉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노발대발하셨죠. 많이 혼나기도 했지만 그 덕분에 탄탄히 훈련받아 오늘의 나로 성장한 거죠.”

그는 “통상 견습생들이 거치는 훈련 기간 2년 만으론 치마만 만들고 나올 수 있기에” 6년간의 견습 기간을 거쳐 단국대 석주선박물관 복식 과정 2년(5·8기)을 수료했다. 후에 33㎡ 남짓한 군자동 한복집을 거쳐 개업 11년 만에 10배 이상 늘어난 규모로 강남으로 진출했고, 2005년 지금의 청담동 사옥을 마련했다. 

자타가 인정하는 워커홀릭인 그에게 “그래도 결혼할 짬은 있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친척 언니의 중매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자신이 매달려서 결혼을 했다며 웃는다. 그러나 일과 가정 사이에서 그의 선택은 거의 대부분 일이었다. 이제 아들은 군대에 가고, 딸은 엄마의 손재주를 그대로 이어받아 의상디자인학과에서 공부 중이지만 아이들이 어릴 땐 일과 가정 사이에서의 갈등이 극심했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두 살배기 딸이 장이 꼬여 응급실에 누워 있을 때도 달려가지 못했고, 2년 전 86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팔순잔치 때는 잔치가 청주에서 열려 도착해보니 이미 잔치가 끝나버린 상황이었다.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오로지 일을 사랑했어요. 육아 고민요? 견디다 못해 일 년간 사정사정해 공무원인 남편이 일을 그만두고 나대신 가정을 돌보게 됐죠. 남편이 원하던 일을 못 하게 한 것, 아마 죽을 때까지 후회할 거예요.”

그러나 그렇다고 육아의 짐이 모두 남편에게 옮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의 사무실 화장실 문 안쪽 눈길을 끄는 상장 하나가 이를 방증한다. 이 상장은 올해 어버이날 그의 딸이 “속 터지는 딸을 꾹 참고 21년간 키워왔으므로 그 노고를 치하”하여 ‘인내상’을 직접 수여한 것.

‘한복 디자이너 박술녀’ 하면 으레 떠오르는 이미지가 ‘한복 전도사’다. 그만큼 국내외 패션쇼를 활발히 전개하는 한편, 나이를 불문하고 다양한 스타와 유명 인사들에게 자신의 한복을 입힌 퍼포먼스로 널리 알려져 있다. 최근만 해도 6월 한국 해비타트 사랑의 집짓기 건축기금 마련 패션쇼, 8월 제35차 세계주문양복연맹총회(WFMT) 패션쇼와 제9차 세계화학공학회의 및 제15차 아시아·태평양 화학공학연맹 학술대회 패션쇼, 9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의 세계여행관광협회(WTTC) 아시아 총회 패션쇼 등 굵직한 행사를 너끈히 치러냈다.

“엄마가 한복 입은 모습을 본 적 있나요?” 묻고파

방송가에 한복을 협찬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말 그의 한복 솜씨가 좋다는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KBS 아나운서들에게 한복을 빌려주면서부터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연예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한복 디자이너가 됐다. 한지혜, 박신양, 김재원, 박경림, 이휘재, 현정화, 안정환, 이소연 등 각계 스타들의 결혼식엔 그의 한복이 어김없이 선보였다. 이런 인연은 이후 스타들의 아이들에게까지 이어져 김희선, 김남주 등은 돌이나 명절 때 아이들에게 꼭 그의 한복을 입히는 대를 이은 단골이 됐다. 홍보로선 더할 나위 없는 전략일 듯한데, 그는 “홍보가 잘 된다고, 또 한복이 좋다고 해서 그것이 꼭 팔리는 한복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패션쇼나 연예인 협찬 모두 우리 국민에게 제발 한복에 관심 좀 가져달라는 아우성이에요. 때론 돌파구 삼아 한복과 양장을 섞어 퓨전 디자인도 선보였는데, 한 벌 파는 데 참 힘들었어요. 그런 과정을 거쳐 깨달았죠. 내 옷이 예쁘지 않아 안 팔리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의 인식이 문제라는 것을요. 한복이야말로 장인들이 한땀한땀 정성 들인 진짜 명품 중 명품인데, 단지 우리 것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값이 싸야 한다고 생각을 하죠. 반면 수입품은 아시아 몇몇 국가에서 OEM 받아 만든 것일지라도 멀리서 왔다는 이유로 명품으로 포장돼 비싸게 팔리잖아요? 정말 어느 게 명품인가요?

기자들이 내게 ‘도대체 왜 한복이 잘 안 팔리느냐’고 물으면 내가 오히려 그들에게 물어봐요. ‘일 년에 당신 어머님이 한복 입는 것을 몇 번이나 봤느냐’고.”

그는 줄곧 7년째 한복이 잘 안 팔리는 불경기를 체감하고 있다. 한복 외에도 이불이나 장신구 등 여러 소품을 디자인하고, 기업과의 협업도 고려하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 중이다. 4년 전엔 사옥을 유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집을 팔아 운영비를 대고 지금은 월세로 생활하고 있다는 그는 “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