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커 집단 ‘어나니머스’ 성폭행 피해자 대변자 자처

국제적 해커 집단 ‘어나니머스’(Anonymous)가 이번에는 억울한 성폭행 피해자의 대변인을 자처하고 나서 눈길을 끌고 있다. ‘어나니머스’는 지난 10월 14일 성폭행을 당한 후 마을 주민들의 집단 따돌림에 시달리다 고향을 떠난 ‘데이지’ 사건을 언급하며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데이지를 돕기 위한 ‘저스티스 포 데이지’(Justice for Daisy) 운동을 벌이겠다고 선포했다.

지난해 1월 18일 미국 미주리주 메리빌에서 14세 소녀 데이지가 친구와 함께 집단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데이지는 의식을 잃은 채 집 정원에 버려져 수시간 동안 추위에 떨다가 가족에게 발견됐다. 성폭행 장면을 찍은 휴대폰 영상이 마을에 퍼졌고 같은 마을의 고등학생들이 피의자로 체포됐다. 그중에는 마을의 유명 풋볼 선수이자 미주리주 하원의원 렉스 바넷의 손자인 매튜 바넷도 있었다.

피의자들은 성관계를 인정했으나 동의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병원 측은 피해자들의 혈중 알코올 농도 수치가 높게 나타났고, 몸에서 5∼10㎝가량의 찢긴 상처도 발견됐다고 발표했지만 사건은 기각됐고 매튜를 비롯한 피의자들은 전원 석방됐다.

데이지 가족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건 이후 데이지의 어머니는 직장에서 아무 이유 없이 해고됐고 아이들은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데이지는 특히 가해자 형제에게서 심한 따돌림을 당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가족은 짐을 싸서 이 마을을 떠났고 얼마 후 데이지 가족이 살던 빈집은 불에 타 무너지고 말았다. 이 사건은 최근 미주리주의 지역신문인 ‘캔사스시티스타’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고 ‘어나니머스’의 관심을 끌었다.

‘어나니머스’는 성명서에서 데이지 사건에 대한 경찰 당국의 즉각적인 재조사를 촉구하며 피의자를 석방한 검사와 렉스 바넷 의원과의 관계를 추궁했다. 또 “데이지와 비슷한 사건이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다”며 “메리빌이 이 소녀들을 지키지 않고, 경찰이 겁을 먹거나 부패해 맡은 바 일을 하지 않고 사법 시스템이 이들을 포기한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들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나니머스’의 성명이 발표되자 소셜네트워크상에서 ‘#Justice4Daisy’와 ‘#OpMaryville’이라는 해시태그하에 데이지의 사건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일부 네티즌은 사건 정보를 담은 동영상을 ‘유튜브’ 사이트에 올렸고 사건을 맡았던 검사의 트위터 계정을 폭로한 지 9분 만에 트위터 계정이 삭제되기도 했다. ‘어나니머스’는 또 22일 메리빌 시내 광장에서 데이지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는 거리 시위를 벌였고 수백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어나니머스가 데이지 같은 성폭력 피해자의 따돌림 사건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미국 오하이오주의 스튜벤빌, 캐나다의 핼리팩스 등에서 일어났던 비슷한 사건에서도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하고 조사를 요구하는 활동을 벌인 바 있다.

어나니머스의 이런 행동에 대한 세간의 반응은 엇갈린다. 묻힐 뻔한 억울한 사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미주리 주정부가 특별검사를 지명해 사건의 재조사를 시작하겠다고 발표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확인되지 않은 정보의 유통과 무분별한 신상 폭로로 또 다른 사이버 폭력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어나니머스가 자신들의 파워를 과시하기 위해 이와 같은 일을 벌이고 있다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CNN은 “어나니머스가 자신들을 ‘오큐파이(occupy) 운동’의 군대로 여기고 싶어 하는 것 같다”면서 “경찰의 부정이 개입됐다고 생각되는 사건을 발견하면 이를 공격해 개인 정보까지 폭로한다”고 우려했다. 페미니스트 블로거들의 모임인 ‘페미니스트’는 “어나니머스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관점과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의 거대한 집단일 뿐”이라며 “이들이 항상 희생자의 입장에 설 것이란 보장은 없다”고 지적했다. 또 “사법 시스템에 앞서 미디어나 개인이 사건에 대해 재판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